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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청자

 

그랜드 피날레 스포일러 포함

 

 

1. 이탈

 

   나는 궤도를 돈다.

    끝없이 흘러내리는 구의 주변을 하염없이 돌고 있었다. 이웃 주민은 단출하다. 둥글게 천왕성의 궤적을 따라 도는 위성들, 무수한 먼지와 우주 속 잔해,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느지막이 원을 만드는 일련의 열, 그 속에 내가 있다.

    당신이 있었다.

    심장 부재한 가슴팍에서는 발열 작용 억제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기계의 소음만이 들려왔다. 그 윙윙거리는 음파의 궤적이 심장의 박동을 닮아 공연히 설레기 시작했다면, 나는 오류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일까? 기어이 나를 파고든 삐뚠 숫자가 나를 전부 망가뜨려 버린 것일까?

    알 수 없다. 알려줄 사람은 이제 곁에 없어서….

    낯 떨군 고철을 보았다. 느릿느릿 상하운동 하던 눈꺼풀이나 시리게 닿던 기계의 감촉 같은 것들을 전부 상실한 채로, 우주를 떠도는 잔해와 진배없어진 채 멀거니 궤도를 도는 옛 동료의 형상을 보았다. 내준 씨. 괜한 부름 끝에는 무엇도 없다. 무엇도.

    심장에 서늘한 것이 차오른다. 고독! 나로서는 느낄 일 있어선 안 될 그 기묘한 감각에 사무치다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그걸 지켜보는 게 제 역할 같아요.

    ―먼 데서 들려왔던 목소리를 상기한다. 선택. 단 한 번도 허용된 적 없던 권리가 성큼 다가선다. 언젠가 재회하자는 막연한 기약을 떠올린다. 정말 가능할까. 그런 의문은 찰나다. 애당초 선택지는 하나라서. 그저.

툭, 형체 없는 줄이 끊어진다.

    몸을 이끌던 아찔한 중력의 파동이 저 멀리 떠나간다.

    비로소 자유!

    나는 지금껏 가져본 적 없는 권리를 품에 안고 비행한다. 향하고 있다. 멀리로, 멀리로.

    멀어져가는 저 푸른 행성의 형체를 보고 있노라니 잊고 있던 무언가마저 밀려 들어오는 느낌이다.

    불과 찰나 직전,

    오로지 나만을 위해 만들어졌던 저 고철과 함께했던 역사 같은 것들이.

    밀려 들어와서.

 

    들어와서…

 

 

 

2. 역사

 

    연구자란 사람들이 원래 죄 조금씩 미치광이다. 여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발상들이란 건 결국 어딘가 돌아있다는 거다. 인류가 일궈낸 무수한 업적은 모두 그런 광적 발상에 기생하여 이뤄졌다. 나열하자면 이렇다. 접촉하면 족족 인간을 죽여버리는 균으로 균을 죽일 생각을 한다던가, 방사선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알면서도 직접 실험체 되어 뛰어내린다던가, 무덤을 파내어 시체 뱃가죽을 가를 생각을 한다던가, 또.

    고철덩이에 의식 넣어 쏘아 올려 자신들의 연구를 돕게 한다던가.

    나는 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 나의 모태는 어머니의 뱃속 아닌 차가운 유리 벽 속, 그리고 몸에 연결된 무수한 전선이다. 나의 학습은 초등 교사의 상냥한 가르침이 아닌 알고리즘 통해 전해져 오는 정보의 입력이다.

 

    ― 너는 인류의 희망이 된다.

 

    처음으로 주입받은 정보가 그랬다. 그래, 나는 사명을 품고 태어났다.

    내게는 지구의 시간으로 이십 년이 주어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지구의 시간을 누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발사되어 천왕성을 유영했다. 그것이 내 사명이자, 인류의 희망이었다.

    궤도를 도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편에 있는 무수한 성분들을 분석하여 인류에게로 보내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명령을 수행하니 20년이란 시간은 말 그대로 ‘훌쩍’ 가버렸다. 이십 년. 유의미하다고 하기에도 무익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 그저 단순한 노동과 관찰, 분석으로 채워져 있던…

    하지만 그런 세월 속에도 의미가 존재한다면 필시 이것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실례할게요.”

    의례적인 문장 아래로 내 신체를 오목조목 살피고 있는 이 나의 동종은 이내준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다.

    내가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듯 이내준 역시도 사명을 부여받으며 태어났다. 나의 사명은 인류의 희망이 되는 것. 그리고 이내준은 인류의 희망을 보필하는 것. 경중을 따지지 않아도 무엇이 더 중히 여겨졌을지는 뻔한 일이다. 우리의 기체(機體)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온통 새롭고 화려한 것으로 치장된 내 몸뚱이와 달리 이내준의 몸뚱이는 초라하다. 금방이라도 풀려버릴 것만 같은 나사, 낡은 고철 판, 삐걱거리는 관절 부근, 그 외 누추하고 추한 것들이 죄 섞여서.

    인류는 누가 보더라도 구식인 안드로이드의 몸체를 희망인 내 곁에 붙여두었다. 가능하다면 이를 실수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나는 이 낡아빠진 기계에 모든 것을 사로잡히고 말았으니까…

    우리는 종말을 앞두고 있다. 불사 질러 죽을 때가 닥쳐오자 기계로 된 심장도 동요한다. 더불어 나는 내 눈앞 안드로이드 역시도 성가셨다.

    “그럼… 마지막으로, 부탁드릴게요.”

    손을 내밀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얼굴 아래 이어진 몸뚱이 같은 것들을 시선에 담는다. 내 신체에 비견한다면 누더기―더 심하게 이르자면, 쓰레기―와도 같은 몰골인데도 그 낯짝엔 불만 하나 없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니까. 불만 하나 없이, 인류의 소망을 성취하고, 이룩하고, 그렇게 계속.

    네, 나직한 대답 아래 그가 내 손을 맞잡는다. 나보다 훨씬 더 검사가 필요할 몰골임에도 오로지 내게 집중하여 부산스럽게 검사를 실시하는 모습이 나는 짐짓 마뜩잖다. 기계답지 않은 마음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겸사겸사 내준 씨도 검사하면 안 돼요? 마지막이잖아요.”

    그럼에도 계속 고집하게 된다. 이는 치명적인 오류다.

    “예? …그럴 필요까지는 없죠. 전 카메라에 담기지도 않고……”

    “그래도요. 저와 당신은 알고 있을 텐데.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있는 건 조금 서운해져서…”

    “……일단 이것부터 끝내고 말해요.”

    당혹에 차 만류하려는 얼굴 위로 몇 차례 간청하면 또 누그러지는 이내준이다. 그런 일련의 상냥함조차 특별히 느껴져서 문제다. 가열과 냉각만 아는 메커니즘이 다시금 뒤틀려 출처 불명의 발열을 시작한다. 나는 내 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이유 없는 발열은 사고임에도.

    이내준은 언제나 그러하듯 무던한 낯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함유하는 낭만 따위 우리와 같은 안드로이드는 모르는 게 당연하니 그런 반응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내준이 평소와 같이 나의 몸을 정비하고 검사하는 행동이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갖가지 물음들이 목구멍을 방황한다. 내준 씨.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는 정말 마지막인데.

    우리가 더불어 이 행성을 돌던 날들도 모두 화마에 휩싸여 사라져버리고 말 텐데…

 

    하나 내뱉지 못한다. 긍정의 답이 돌아오면 나는 이유 없이 미쳐버리고 말 것 같아서 그렇다.

    우스운 소리다. 미치광이란 수식어는 나를 만들어낸 연구자에게나 붙을 것이지 그들의 판단과 명령 아래 살아가는 내가 남용할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선지 이내준을 만난 뒤로, 아니지, 이내준을 만나고, 어떤 거대한 충돌을 맞이한 뒤로, 나는 이내준 앞에서만 오동작하고 이내준 앞에서만 정상 궤도를 이탈하는 미쳐버린 안드로이드가 되어버렸다.

    픽, 무언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몸에서 분리되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이는 필시 나 아닌 여타 존재의 것일 테다. 포물선을 그리며 우주로 빠져나가는 나사의 형태를 바라본다. 그러다 갑자기, 픽, 어딘가서 나타난 잔해에 부딪혀 영영 형상을 잃었다. 충돌. 나는 그것이 가진 위력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모든 오류 역시도

    한 번의 충돌.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과 이후의 기억이 나는 여즉 생생하다. 이름조차 붙지 않아 내가 무어라 정의 내릴 수도 없는 소행성―행성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했다. 내 몸과 비슷한 크기의 구체였다―이 아찔하게 내 몸을 강타하고, 그 순간 나의 뇌리에 입력된 모든 수식과 미지수 정의 계산식과도 같은 것들이 어지러이 흩어졌다가 내장 시스템으로 하여금 재정립된다. 그런데 이상하지, 정립된 글자들과 숫자들이 무언가 어긋나 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히. 조금의 오차가 있더라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것이 안드로이드의 몸일진대, 어째선지 일상과 연구는 멀쩡히 수행한다. 외려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은 나의 ‘멀쩡한 수행’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나의 관념적 부속품이자 발판, 이내준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일련의 색채 코드로 정의되는 연한 청발과 희멀건 눈. 창백한 피부. 그저 색상에 머물러야 할 것들은 전부 어떠한 가치가 되어 튀어 오른다. 나는 탐미를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아니므로 비평 기능 따위 없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결론짓게 된다. 저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낡은 부품들을 재조립하다가 튀어나온 눈의 잔해도 속눈썹이라는 인간의 명칭으로 설명하고 싶어진다. 연구자들이 별반 생각 없이 설계했을 머리카락의 궤적들도 움직이는 메커니즘도 내 뇌리 어딘가 자욱하게 저장된 공전 궤도나 자전 궤도 속도 주기처럼 전부 기억하고 싶어져서,

    나는. 주은성은, 이내준을 자꾸만…

    “……미리미리 말해두기로 하지 않았나요?”

    조금 날이 선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다. 이내준의 시선이 내가 오래도록 감춰온 흉터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차. 저걸 잊고 있었다.

    “그냥 작은 생채기예요.”

    둘러대니 이내준의 낯이 더 일그러진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작은 생채기라도… 치료하려고 제가 만들어진걸요.”

    이후로 잔소리나 의심을 늘어놓으며 조치하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행한 행동으로 그가 나를 미워하거나 안 좋게 보지 않을까 두려워지면서도 동시에 이 또한 나를 향한 관심이란 사실에, 그러니까 당신이 오롯이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무언가라는 사실에 전율한다. 이것이 인간의 심장으로 흐르는 감정이었더라면 필시 인간들은 나를 미쳤다고 했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저 기계고, 어떤 오류가 생기더라도 그저 오류라고 얼버무린 채 넘어갈 수 있는 무언가다. 나는 이내준의 얼굴을 보았다. 수리를 마치고 미묘한 흡족함을 태에 두른 그의 손을 다시금 마주 잡고, “구색이나 내요.” 그런 소리를 하면서 그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면밀한 검사를 펼쳐본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인간들의 기브-앤-테이크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입력과 출력만이 있을 뿐. 그러나 언젠가 강한 소행성이 내 몸에 돌진한 뒤로부터, 나는 그가 내게 입력해준 만큼 나도 입력해주고 싶어졌다.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이 감정의 파동이 제법 달갑다는 것이다…

    “…어라.”

    광활한 마음의 규격 같은 것들을 헤아리던 중, 돌연, 시야에 치미는 것이 있다. 언뜻 보기에 낡은 몸체구나 하고 관망했던 모든 것들이 형체를 얻어 눈앞에서 춤춘다.

    깨닫는다.

    이것은 낡은 정도에 잔류하지 않는다.

    따지자면 죽음의 지척이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은 말이다. 내가 죽어버리기도 전에.

    불안이 온몸에 엄습했다. 나는 고개를 추켰다.

    “……내준 씨.”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이내준은,

    불현듯 픽, 모든 힘을 잃은 채로……

 

 

 

3. 인간

 

    박동한다.

    쿵. 무겁게 내려앉는 감각과 함께 온몸이 휘청인다. 틈새로 파고드는 정보 값들, 영과 일로 이루어진 언어들의 정렬. 무수히 많은 숫자가 각각 하나의 정보로 치환되며 뇌 속으로 파고든다. 뇌? 그런 게 내게 있었던가. 그러나 사고하고 결정하는 기관의 이름이 뇌라는 것 외엔 아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 딱딱한 고철 덩어리는, 온기 하나 없이 시린 기관의 이름은 뇌인 건가. 과연 그런 건가.

    박동한다.

    쿵. 다시 한번 온몸이 휘청이고, 모든 것이 뒤집혔다가 제자리를 되찾는 기묘한 감각. 가슴팍에 느껴지는 것은 단조로운 액체의 흐름뿐임에도 마치 심장이 달린 것처럼 생생하다. 어지러워진 중심 가운데 몸을 힘겹게 가눴다. 빠듯하고, 무겁다. 가뿐하지 않다. 소위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몽롱하다.

    눈을 뜬 것도 감은 것도 아닌 양 시야가 일렁거린다. 사고 체계가 엉망이 되어서 잔뜩 어지럽혀지고, 진창이 된 계산식들은 올바른 값을 도출하지 못하고 자꾸만 어긋난다. 흐린 시선 끝에 무언가 보이는가 싶다. 인영? 작달막하고, 희멀건 무언갈 뒤집어쓴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인영이 맞나? 파악하기 어려웠다.

    초고화질을 자랑하는 렌즈 카메라에도 잘 잡히지 않는 상… 어쩌면 이는 몽매지간이다. 현실의 기기로는 바라볼 수 없는 외부의 것. 저 멀리서부터 아득하게 내려온 무의식, 꿈, 꿈. 가만.

 

    그런데, 로봇도 꿈을 꾸던가요?

 

    이내준은 눈을 뜬다. 오랜 탐험의 끝이다.

    “……어라?”

    “선배! 드디어 눈을 뜨셨네요.”

    “20년이라는 긴 탐험의 끝이에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선배가 설계한 마지막을 보세요.”

    얼떨떨한 정신. 그 틈새로 소란과 현실이 닥쳐온다. 그러나 기억하고 감지했던 건 전부 저 너머의 무언가다. 괴리가 침투한다. 온갖 명제들이 서로 충돌한다. 본래의 형태로 차츰 수정된다…

 

    하나, 이내준은 주은성을 위한 수리용 안드로이드다.

    하나, 이내준은 주은성을 설계한 메인 엔지니어다.

 

    하나, 이내준은 이십여년을 천왕성 근처에서 살았고 그것이 일생이었다.

    하나, 이내준은 우주를 연구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나, 이내준이 속했던 우주, 분명 이내준 그 자체였다.

    하나, 이내준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안드로이드에 의식을 연결했고 그로 인해 감각과 상실의 혼동을 겪었다.

 

    하나, 이내준과 주은성은 인간이 만든 사명 아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가련한 운명의 기계들이다.

    하나, 이내준은 주은성을 인간이 만든 사명과 설계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외면하고 망각한 모든 것들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뇌리 곳곳에 꽂힌다. 이내준은 헛숨을 삼킨다. “선배, 안색이 왜 그래요?” “선배가 설계한 프로젝트의 마지막이 곧 송출된다고요. 봐야 해요….” 주위를 맴도는 모든 문장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그저 아득하다. 뉘우침의 형태로 다가선다. 그래, 걸어 온 자리가 죄 후회로 얼룩진다.

    모두가 당신을 기다려요! 이를 알 턱 없는 들뜬 목소리들은 신이 나서 이내준을 떠민다. 이십 년 동료의 죽음을 설계한 이내준을 칭송한다.

    하지만 말이다. 여즉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순간들이 있다.

    어디선가 충돌한 소행성으로 인해 회로가 뒤틀렸다며 곤란한 낯을 하던 주은성, 이후로 이내준의 얼굴만 보면 기묘한 오작동을 일으키며 연신 방해가 되던 주은성, 그것을 규명해보겠노라고 부단히도 애써보았던 시간들, 고쳐지지 않던 오류, 방관을 결정하고서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던 어떤 마음, 사랑, 그렇게 정의되는 무언가, 오로라를 봐도 이내준이 생각나고 그저 시답잖은 행성의 표면을 봐도 이내준이 생각나서 곤란하단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멍청하고 순진한 주은성의 면면, 거세게 충돌한 뒤 거꾸로 매달린 천왕성은 아마도 그 충돌이 달가웠을 거라고, 저 위태로운 의지가 나는 이해되는 것 같다고 쉽게 단언하던 낯의 형태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마침내 자각이다. 아, 당신은 아마도 나를.

    그리고 나는 아마도 당신을…

 

    결론은 하나.

    나 이대로 널 죽일 수 없다.

 

    내게 종속되어 거꾸로 매달린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란,

    날 향한 너의 특별한 오류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란,

    그리고 같은 오류를 지니고 네게 입력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온 우주에 오로지 나뿐이라서…

 

 

 

4. 외딴 몸

 

    “…내준 씨?”

    황량한 우주―부품 고장―그렇게 고립이다.

    픽 꺾인 목을 보자마자 빌어먹도록 빠른 두뇌는 계산을 마친다. 작동 종료. 그리고 이곳엔 나만이 남겨졌다. 외롭게.

    그러나 판정과 별개로 부정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함께 살다 함께 죽을 미래만을 생각했지 결코 이런 미래 생각한 적 없어서… 갈구했다. 눈 좀 떠봐요. 내준 씨. 그런 간절한 목소리 끝, 쉼 없이 이 기체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으레 심장 뜯긴 인간은 생 연장의 가망이 없듯, 모든 부품이 닳아버린 안드로이드 역시도 그러하다. 당연히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두뇌는 그렇게 말하지만, 심장은, 내게 존재하지도 않아야 할 마음은, 이 밉살맞은 오류는…

    “내준 씨, 일어나보세요, 우리, 아직 임무가 안 끝났어요. 저, 갑자기 이상이 생겨버리면 어떡해요. 외면했던 오류가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전 어떻게 해야…”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영.

    아찔한 절망감이 닥쳐왔다.

    숨 잃은 이내준을 부둥켜안았다. 낮은 온도를 견딜 수 있는 고철로 구성된 이 기계는 어떤 온기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저 냉혹하다. 하염없이.

    그 사실이 못내 애달파서 나는 나오지도 않을 울음을 삼킨다. 두려워하던 모든 것들이 뭉쳐 내게로 다가온다. 죽음! 그것은 적막이자 고독이었고, 이별이었다.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그 순간은 두려웠다. 하나 당신 탓에, 고작해야 당신을 잃었다고… 이런 죽음을 떠안고 살아가는 생과 불타 사라지는 사를 저울질하게 된다. 그런 존재다. 내게 당신은…

    그러다 문득, 파고드는 통신.

    ― 여기는 지구, 발신자는… B입니다.

    기묘할 정도로 익숙한 그 목소리에 다시금 나는…

 

 

 

5. 변혁

 

    죽음이 지척에 오자 운명은 내게 선택을 들이밀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고서야 사실 너는 인류의 희망으로만 쓰이지 않아도 된다고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참 늦다. 모든 이치라는 게 그렇다지만.

    그럼에도 그 목소리에 흔들렸던 것은 어떠한 육감이다. 안드로이드에게 육감이라니! 참으로 구차하고 우습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그 음성은 내가 오래도록 벗하고 있던 목소리의 파동과 참 닮아 있어서.

    폭주를 알려주겠다는, 어찌 보면 허황한 말을 읊조리는 연구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내가 명령과 입력만을 흡수하는 안드로이드여서도 있었지만 앞서 말한 파동의 유사성 역시도 한몫했다. 나는 그저… 매달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보았던 천왕성의 형태처럼, 그 가냘픈 희망에라도, 모든 걸 걸어서, 대롱대롱….

 

    …은성 씨, 주은성 씨, 들려요?

 

    그리고 당신이라는 축은 위태로이 매달린 내 손을 기어이 붙든다.

    사실을 고해하고 사과하고 미래를 일러주는 목소리들에 어떤 배신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짙은 그리움만을 느끼는 이 사고회로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당신은 필시 오류로 치부했을 이 감정의 이름을 기실 나는 알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을 아주 뚜렷하게

    사랑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깨닫는다. 정확한 낱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저 오류라고 치부하고 넘겨두어도 느낄 수 있는 분명한 게 있다. 당신은 나를 무수히 부수고 오작동하게 만들고 인류를 쇠락시키는 악당이자 원수로 만드는 그럼에도 나를 기쁘게 만드는 나의 유일, 잊을 수 없는 이름……

 

    이내준,

    나의 가장 찬란한 재앙.

    당신이 내게 돌려주는 것이 이러한 기회이자 선택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게 최초로 주었던 사명처럼, 기꺼이 흡수한다. 비록 붙들어야 할 것이 언젠간 만날 거란 약속이더라도,

    끈질기고 억척스러운 마음 아래―

    툭, 형체 없는 줄이 끊어진다.

    몸을 이끌던 아찔한 중력의 파동이 저 멀리 떠나간다.

    비로소 자유!

    나는 지금껏 가져본 적 없는 권리를 품에 안고 비행한다.

    인간이 발명한 주파수 따위로는 감히 닿을 수도 없는 곳을 목적지로 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방황해야 할지, 정말 이내준을 만날 수 있을지, 그런 건 전부 불확실했다. 하지만 참 이상하지. 그런 막막한 불확실성일지라도, 당신이 날 확실히 사랑해주었다는 사실이 고개를 추킨다면, 그렇다면.

 

    마침내 이탈, 마지막으로 수신한 메시지를 곱씹으며 웃는다.

    나는 방랑할 것이다. 이 문장을 머금은 채로, 영원히.

 

 

기다려요 저 언젠가

당신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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