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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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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위해 우리가 일합니다. 도로변에 설치된 야립 간판의 표어란 그런 것이었다. 정갈한 글씨 곁에서는 환한 웃음을 머금은 정복 차림의 남녀가 주먹을 꽉 쥔 채로 파이팅 자세를 하고 있었다. 작위적인 광고판을 보고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웃겨. 조소 섞인 목소리를 조수석의 여성이 타박했다. 애 들어요. 그와 동시에 돌연 차체가 덜컹, 흔들렸다. 세상모른 채 자고 있던 소년이 갑작스러운 충격에 더듬더듬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 틈새로 부모의 걱정 섞인 대화가 들려왔다. 또 이러네.
    수리를 맡겨야 할까 봐요.
    아예 새 걸로 맞추는 건?
    나 참,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은성아, 새 차 갖고 싶지? 저번에 영화에서 봤던 빨간 거 어때?
    백미러를 통해 눈을 맞추며 소년의 아버지가 능글맞게 눈썹을 으쓱거렸다. 여즉 잠에 취한 소년은 마땅한 대답 없이 침음만을 뱉었다. 으음…. 애매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남녀는 즐겁게 웃었다. 아직 피곤한가 봐. 소년의 어머니가 애정 어린 음성을 흘렸다. 소년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머나먼 글자를 바라보았다. 맨 앞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이었다.
    목적지까지 1시간 40분
    그 글자 옆에는 사람들이 으레 가족 여행으로 자주 찾는 유명한 관광지가 적혀 있었다. 아직 한참 남았구나. 그리 중얼거리며 소년은 다시 눈을 감았다. 긴 시간 뒤에 눈을 뜨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아늑하고 드넓은 숙소가 찾아올 줄로 알았다.
    오산이었다.
    둔탁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하여 정신을 차렸다. 하염없이 치우치는 상체를 안전띠가 가까스로 저지했다. 차체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뇌리를 타고 위기감이 엄습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차창 너머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도로변도 표지판도 아닌 하늘이 있었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아득히 땅이 보인다. 구태여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추락이었다.
    차체는 직선으로 추락했다. 휘청이는 공간에서 한 번 더 정신을 잃었다가, 전신에 퍼지는 아찔한 고통에 눈을 떴다. 은성아! 깜빡거리는 정신 속에서, 추락의 과정에서, 그런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절박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던 것도 같다.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것도 같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보호했던 것도 같다….
    무방비한 얼굴 구석구석으로 깨진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자 가슴이 절로 선득해졌다. 좀체 뜨이지 않는 눈에 수없이 힘을 주며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박하게 호명했다. 엄마, 아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생기를 잃고 피 흘리며 고꾸라진 두 인영이 눈에 들었다. 익숙지 않은 모습에 공포감이 앞섰다. 계속해서 호명했다. 울부짖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어렴풋이 깨달으면서도.
    이곳은 어디지. 어떡해야 하지. 그런 생각으로 절박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무엇 하나 온전한 게 없었다. 찌그러진 천장은 작은 체구의 소년만을 온전히 지켜냈고, 소년의 부모는 천장이 내려앉은 대로 목이 꺾여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박살 난 내비게이션의 화면은 온통 일그러져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예정되었던 목적지도 남은 시간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미지였다. 깨닫는 순간 아찔한 절망감이 스쳤다. 욕지기가 일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폐부 깊숙한 데서부터 기이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리고
    타는 냄새가 났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곧 숯처럼 어두워진다. 전신을 타고 화끈거리는 감각이 퍼져나간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분명 위급한 상황일 텐데도, 이상하게 눈이 감겼다. 의식을 잡을 새도 없이 소년은 까무룩 기절했다. 명멸하는 정신 너머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뜨거워…….
   
    이것은 최초의 기억이다.
 
 
 
 

*

 
    긴 악몽을 꾸었던 것 같다.
    아니, 현실인가?
 
    주은성은 눈을 뜬다.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꿈에서 겪은 아찔한 고통과 똑같은 것이 허리를 짓누르며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몸을 눕히자, 딱딱한 침대 시트가 그대로 등에 닿았다. 기존에 눕던 것과 다른 재질이었다. 때늦은 의문이 섰다. 여기는 어디지? 주변을 살피기 위해 다시 일어서려 들었다. 허튼짓 말고 누우라고 종용하듯 닥쳐오는 아릿한 느낌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어? 일어나시면 안 돼요.”
    그런 소리와 함께 어깨가 붙잡혔다. 붙잡은 사람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곧장 손에 힘을 주어 주은성을 다시 침대에 눕히려 들었다. 주은성은 본능적으로 어깨에 닿은 손을 뿌리쳤다. 적대감 가득한 손짓 위로 짧게 불이 튀었다. 화들짝 놀란 여자가 엄살을 부렸다.
    “앗, 뜨거워!”
    “뭐야, 너.”
    “네? 저요?”
    흰 가운을 입은 어린 여자는 황당무계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주은성은 대답 없이 가만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여자는 성가시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제 머리를 헤집었다. 답답하다는 듯 주은성의 낯에 대고 물었다. 기억 안 나세요?
    “폭주하셨잖아요. 반쯤 죽어서 온 사람 살리느라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아세요? 가이딩 결핍 수치가 그렇게 높은 환자는 또 처음이었네….”
    “…….”
    “언론에서도 온통 그 얘기예요. A급 센티넬 폭주! 센티넬들, 과연 안전한 존재인가… 당국의 예방 조치 어쩌고저쩌고… 아, 생각하니 또 짜증나네. 뭔 괴물 취급이야?”
    모든 정신이 돌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끈거리는 두통 아래 혼탁하게 뒤섞인 기억들이 급습했다. 동시에, 여성의 뒤편, 작은 텔레비전 화면이 눈에 들었다. 뉴스 속보가 송출 중이었다. 불 이능력 A급 센티넬 폭주, 원인은 보호자 가이드의 의도적 방임…. 주은성의 눈동자가 노골적으로 요동쳤다.
    “뭐, 사실 폭주가 은성 씨 잘못은 아니지만… 아.”
    뒤늦게 시선을 눈치챈 여성이 한껏 과장된 동작으로 달려가 전원 버튼을 조작했다. 뉴스 화면이 새까맣게 꺼졌다. 주은성이 미간을 구겼다.
    “다시 켜.”
    “네? 안 돼요. 지금 스트레스받으면 재폭주한단 말이에요.”
    “켜라고.”
    “아니… 재폭주하면 제 책임이라니까요? 설명은 제가 해드릴…….”
    “…….”
    “………아, 알았어요. 대신 이거, 수치 올라가면 바로 끕니다?”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여성이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정갈한 외형을 한 아나운서의 입술 너머로 현실이 범람했다. 해당 센티넬의 가이드를 자처한 K씨는 센티넬의 부모와 막역하던 사이의 동료로, 폭주 시 나오는 사망 보험금을 노린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K씨는 경찰 측에… 현재 피해자인 센티넬은 의식을 잃고…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이 사정없이 떨렸다. 병상 옆에 설치된 기계에서 위협적인 경고음이 울렸다. 의사 가운을 입은 여성이 이를 확인하자마자 다급하게 뉴스를 껐다.
    “아, 그러니까 보지 말….”
    “…….”
    “라니까…….”
    주은성의 침잠한 낯빛을 보고 여성이 말끝을 흐렸다. 의례적이고 추상적인 위로가 그의 귓전에 닿았다. 은성 씨. 괜찮아요. 은성 씨 잘못 아니잖아요. 앞으로는 그 미친 새끼랑 연락할 필요도 없고, 착취당할 필요도 없어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맞춤형 가이드도 마련해드릴 테고, 이제 국가 소속 센티넬로서 활동하면 되는 거니까….
    죄 기가 차는 소리였다. 주은성은 대놓고 조소했다. 새까만 TV 화면에 비친 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붕대로 휘감긴 제 얼굴의 반쪽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붕대를 풀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이가 없네, 정말… 나직한 혼잣말 뒤, 반항적인 음성으로 여성에게 물었다.
    “뭘 해줄 수 있는데요?”
   주의 충격으로 아주 잠시 잊었을지언정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삼촌이라는 호칭을 기꺼이 자처하며 자신에게 다가왔던 K의 모습도, 보호자가 생겨 다행이라고 웃던 주변인들의 모습도. 이후에 벌어진 모든 일에 있어 누군가 도움을 제공한 적이 있던가? 아니. 있었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주은성은 늘 홀로 남겨져 갈구해야만 했다. 커다랗게 자신을 집어삼키는 화염 앞에서 K가 지은 환한 웃음이 잔상처럼 공막 부근에 남아 있었다. 헤픈 기대가 배신감으로 전락한 건 예전의 일이고, 지금에야 남은 건 허무와 비소뿐이다. 그런데 지금에야 무언갈 기대하라고 종용한다. 지울 수 없는 것들이 남아버린 지금에야.
    “당신들이, 나한테….”
    그것은 기만이라고, 주은성은 평가했다. 떨리는 음성을 마주한 여성이 탄식을 뱉었다. 동정이나 측은지심보다는 냉소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저기요, 은성 씨.”
    냉담한 목소리가 귓전에 박혔다.
    “제가 은성 씨 같은 경우를… 처음 보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인간 불신이니, 그런 거 전부 이해하는데.”
    “…….”
    “그런 건 하나도 도움 안 될걸요. 적응이 상책이에요.”
    덤덤하게 현실을 뱉어내고서 여자가 등을 돌리고 병실을 나갔다. “푹 쉬세요. 몸 좀 회복되고 나면 등급 재측정 실행한다니까 참고하시고요.” 마지막까지도 현실을 말하는 태도에는 일말의 이상도 낙천도 없었다. 주은성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력한 숨을 뱉으며 몸을 눕혔다. 탁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그저 우스웠다. 전부.
 
 
 
 

*

 
    환한 웃음 위로 피어오르는 매캐한 향이 애달프게만 느껴졌다. 공허한 낯을 한 소년을 두고 사람들은 제멋대로 떠들었다. 그토록 단란한 가족이었는데, 안타깝기도 해라. 쟤는 이제 어쩐대요? 그래도 지원금이 있잖아요. 부모가 센티넬이랑 가이드였고. 그게 중요해요? 저 어린 애가 돈 굴러가는 원리를 어떻게 안다고. 왜, 그래도 그 사고로 발현했다면서요? A래요. A. 그러면 국가 쪽에서도 잘 대해줄걸요? 쓸 만한 인력인데. 썩히겠어요, 그걸? 에이,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온 애가 소년병 짓을 잘하겠어요. 그냥 불쌍해진 거죠.
    부모님 따라갈 날도 얼마 안 남은 거지…….
    사람들은 참으로 기이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귀가 막혔다는 말과 상통하지 않음에도 다 들리도록 잡음을 뱉어냈다. 널따란 장례식장 구석에 우두커니 선 소년에게 다가와 사람들은 참 다양한 가식들을 내뱉었으나, 하나같이 와닿지 않았다. 그들이 곧 뒤돌아 소년이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해 떠들고, 알량한 동정과 탄식을 통해 도덕적 우월감에 취하리라는 사실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고작 며칠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독 특별했다.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겁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장례식장에서 언성을 높이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후회가 앞선다. 유독 작위적이라는 사실을 당시에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왜 그 모습에 현혹되었을까. 나의 불행을 떠들던 사람이 그에 비해 훨씬 내게 호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간과했을까. 왜 그가 들려주는 아버지와의 추억에 취해서, 그의 따뜻한 웃음과 아버지를 닮은 말버릇 따위에 이끌려서. 왜.
    하나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가혹하다. 한바탕 소란 끝에 소년의 어깨를 감싸던 온도가 참으로 따뜻했다는 것을 소년은 기억하고 있다. 그와 함께 흐른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했는지도.
    네가 은성이구나.
    가식적인 알은체가 얼마나 벅차게 느꼈는지도.
    이제는 끔찍하기 그지없어진 목소리지만, 당시에는 정말이지 달콤했다. 그랬기 때문에 가장 큰 상흔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능숙하게 걱정과 책임감 따위로 얼굴을 물들이고, 소년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채 그가 속살거린 문장들은,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흉이고 기억이었다.
 
    저 사람들이 헛소리하는 거야. 기죽지 마라.
    넌 아직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에이, 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냐? 삼촌이라고 불러도 돼.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는 삼촌이 널….
 
    “―헉!”
    반사적으로 상체가 튀어 올랐다.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간신히 뱉어냈다. 축축해진 뺨 위로 식은땀이 직선의 궤적을 그렸다. 고개를 돌리자 벽시계가 보였다. 가느다란 시침이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의 바이탈 사인이 귓가를 스쳤다. 삑, 삑, 삑…. 현실감이 다가섰다. 자신은 그때가 아닌 지금에 있다. 주은성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가시지 않은 화상의 고통이 척추를 타고 아릿하게 이어졌다.
    문이 열린 건 그 순간이었다. 수치 상승을 인지한 그의 담당의―폭주에서 깨어난 그에게 현실을 종용했던 여자―J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얼굴을 한 J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은성의 병상으로 달려왔다.
    “왜 이 시간에 수치가… 아.”
    땀으로 범벅이 된 주은성의 모습을 보자마자 J가 알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또 악몽이에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이었으나 언젠가의 걱정들처럼 주은성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가 반항적으로 답했다.
    “신경 꺼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주치의라서요. 또 밤새우실 거죠? 마침 잘됐네요. 원래 내일 아침에 전달하려고 했는데….”
    J는 그런 말과 함께 주은성의 병상 위로 웬 파일철을 던져두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펼쳐보자,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인적 사항이 주르륵 이어졌다. 영문 모른 채 일련의 페이지를 넘기다 주은성은 퍼뜩 깨달았다. 파일철에 채워진 사람들은 전부 가이드였다.
    “……설마.”
    “네. 은성 씨 가이드 후보 목록이요.”
    머리가 어지러웠다. 악몽의 여파가 파일철 위로 고스란히 스쳤다. 멀끔한 증명사진들이 전부 K의 얼굴로 범벅이 됐다.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골을 울렸다. 내가 왜 널 가이딩 하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은성아, 삼촌은 너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병적으로 질색하며 주은성은 파일철을 내동댕이쳤다.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J는 무덤덤하게 그것을 주워들어 다시 주은성에게 건넸다. 주은성은 거세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
    “집어치워.”
    적대감 가득한 목소리에도 J는 꿋꿋했다.
    은성 씨, 충고하는데. 가이드 그냥 고르는 게 나을 거예요. 어차피 가이딩 수치 유지하시려면 지금처럼 계속 임시 가이드가 와야 하는데, 그보다는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게 낫잖아요.”
    기가 찼다. 그건 아무리 봐도 치료를 위한 가이딩조차 끔찍하여 경기를 일으키던 주은성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선량함을 외칠 땐 언제고 이토록 가증스럽게 구는구나. 익숙한 배신감에 몸을 떨며 주은성이 J를 돌려보내려 할 때였다. J가 한숨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몸이 다 회복됐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대답하지 않자 J는 언젠가처럼 덤덤히 종용했다.
    “은성 씨 다음 주부터 게이트로 투입이에요.”
    “…뭐?”
    “말했잖아요.”
    불현듯 주은성은 깨닫는다.
    “적응이 상책이라고.”
    이곳 역시도 조직의 형태를 띤 K라는 사실을.
 
 
 

 
*
 

    세계를 위해 우리가 일합니다. 센티넬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체계 아래 정부가 내세운 슬로건과 이미지는 늘 같았다. 자발적으로 국가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센티넬과 가이드, 그들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며 최선의 기량을 뽑아낼 수 있도록 돕는 국가. 그들은 인기 연예인들을 섭외하여 센티넬 협회를 홍보함으로써, 센티넬 인식 개선 교육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의무화함으로써 구색을 맞췄으나, 전부 ‘구색’에 머무를 뿐이었다. 되레 없느니만 못한 가식이었다.
    실상은 이렇다. 국가에게 있어 센티넬은 현 시국에 가장 유용한 수단일 뿐이다. 각종 게이트가 출몰하여 일상이 위협받는 때, 일반적인 병기로도 좀체 해결되지 않는 던전은 센티넬들의 압도적인 능력 앞에서 손쉽게 무너졌으므로. 고작 개인의 의사 하나 때문에 그를 방치하게 두진 않았다. 부드러운 압박에서부터 노골적인 강요까지. 방식은 다양하고, 센티넬들은 끝끝내 전장에 보내진다.
    가이드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센티넬도 예외는 아니었다. 뉴스 보도에서는 국가가 주은성에게 충분한 정신적 치료와 회복 기간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으나, 진실은 그와 동떨어져 있었다. 주은성은 신체가 회복되자마자 바로 게이트로 내던져졌다. 가이드를 고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이딩이 절박한 상황마다 임시 가이드를 투입하여 주은성을 어떻게든 쓸 만한 인력으로 만들어두었다. 주은성은 당연지사 반발했으나 빌어먹을 본능은 제게 주어지는 회복을 마냥 뿌리치지도 못했다. 억지로 게이트 안에 투입되고, 살기 위해 투쟁하고, 이후엔 억지 가이딩을 받는 생활이 무수히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은성의 의사는 모조리 배제되었다.
    “그러게, 적응이 상책이라고 했죠?”
    착지하는 헬기 속에서 J가 주은성에게 핀잔했다. 얄궂은 목소리가 듣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프로펠러 소리 아래 헬기가 땅에 내려앉고, 곧장 문이 열렸다. 음침한 기운을 풍기는 게이트의 입구가 눈에 들었다.
    한때는 저딴 곳엔 들어가지 않겠다고 반항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차라리 빨리 처치하고 나오는 게 나은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참, 초반에 했던 능력 재검 기억나요?”
    곁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J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주은성이 몸을 풀었다. “저거 끝내면 되는 거죠.” 체념 섞인 목소리로 J를 향해 묻자 그녀의 안색이 난처하게 굳어졌다. 몇 개월가량의 혹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J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니, 사실 은성 씨가 그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어서….”
    “뭔데요?”
    “그, 저번에 능력 등급 재검받았잖아요. 결과가 지금 나왔거든요? 원체 비현실적인 결과라서 검토에, 검토에, 검토를 거듭하다 보니 이제야 나온 거긴 한데, 여하튼.”
    그녀가 다급한 손짓으로 품을 뒤적이더니 돌연 어떤 서류를 주은성의 시야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난잡한 글자들이 뒤섞여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뚜렷하게 박힌 알파벳 하나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S.
    주은성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글자였다.
    “보여요? 은성 씨 S급이래요.”
    “……그래서요?”
    “이젠 그냥 가이드가 싫다고 고집할 일이 아니라는 거죠.”
    은성 역시 알고 있었다. 희귀한 등급일수록, 희귀한 능력일수록, 국가는 해당 센티넬에게 강제력을 더 심하게 발휘한다. 주은성은 그런 국가의 통제 아래 억지로 맺어졌다는 페어를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일부는 만족한다고 했고 일부는 최악이라고 했다. 주은성에게는 후자의 경우가 더욱 와닿았지만.
    “아무튼 난 가이드 만들 일 없어요.”
    그랬기에 주은성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거부할 것처럼, 목소리에 힘을 단단히 주고서.
     다른 것은 국가의 억압 아래 수용하더라도, 가이드만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최초의 가이드가 남긴 흉터는, 완치된 지금까지도 이따금 생생하게 아려오곤 했다. 법정에서 내린 징역형과 연락처의 삭제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주은성은 자신이 과거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더더욱.
     “아하하, 근데 어쩌죠?”
     이런 상황 따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이미 생겼다는 걸 좀 돌려서 전하려고… 꺼낸 말이었거든요.”
     어색한 목소리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헬기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뒤돌자, 게이트에서부터 이쪽으로 걸어오는 어느 인영이 보였다. 부연 설명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눈치는 있었다.
     “그, 이게 확정도 아니고요! 일단 지내보고 영 안 맞으면 저희가 조정 해줄 거예요. 아, 그리고. 원래 갑작스러운 만남이 있어야 더 빨리 친해지는 법이잖아요?”
     어쩔 줄 몰라 하며 J가 흘리는 변명 따위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은성의 모든 신경은 국가가 억지로 맺은 가이드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옅은 빛의 푸른색이 시야에 꽉 찼다. 색조를 상실한 눈동자는 무덤덤하게 주은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하게 헬기 좌석에 앉아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주은성 앞에 그가 꼿꼿하게 섰다. 눈동자를 한 차례 굴린 뒤 지극히 형식적인 인사를 뱉었다. 나직하고 뚜렷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이내준입니다.”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

 
     전 가이딩 안 받습니다.
     내내 인사를 거부하고 상대를 외면하던 주은성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억지로 함께 게이트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일방적인 통보를 들은 이내준의 시선에 노골적인 황당함이 어렸다.
     “…예?”
     “가이딩 안 받는다고요.”
     처음 이야기한 거부에 쐐기를 박으며 주은성이 걸음을 옮겼다. 온통 새까만 게이트의 풍경 위 그의 이질적인 보폭이 새겨졌다. 그를 느리게 뒤따르며 이내준이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울컥 반항심이 치밀었다. 누군 가이딩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줄 아나.
     국가의 억지력을 향한 반발심이야 이내준 역시도 충분히 이해하고 동감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센티넬을 너른 마음으로 포용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내준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일전에 보았던 주은성의 전투 동영상이 떠올랐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도, 그것을 활용할 때는 자꾸만 주춤거리던 모습. 그러면서 가이딩은 거부한다는 사실이 기가 찼다. 애초에 가이딩 거부라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생을 연명하는 센티넬이 가이드에게 저런 말을 하는 저의야 뻔했다. 얄팍한 기 싸움이다. 관계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나, 그냥 국가에 대한 반항심을 자신에게 푸는 것이거나.
     이내준은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쉽게 말려줄 생각은 없었다. 목소리에 힘을 주고 부러 빈정거렸다.
     “공격도 망설이는 센티넬이 가이딩까지 거부하면 어쩌게요? 폭주하고 싶어서 그래요?”
     성큼성큼 이어지던 주은성의 걸음이 그대로 뚝 멈췄다. 그 가슴팍이 느리게 오르내리는 모습이 뒤에서도 뻔히 보였다. 호흡 끝으로 주은성이 뒤돌아 이내준의 앞에 섰다. 노골적으로 찌푸려진 미간 따위가 눈에 들었다. 이내준은 살짝 시선을 올린 채로 그 작태를 가만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 초의 정적 끝에 주은성이 입을 열었다. 불쾌감이 여실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저 아세요?”
     “네?”
     “아니, 저희 오늘 처음 보잖아요. 아는 것 하나도 없는 주제에 아가리 나불거리는 꼬락서니가 이해가 안 돼서요.”
     잔뜩 비꼬며 웃는 모습이 퍽 능숙했다. 상대의 속을 뒤집어 두기에 족한 비아냥이었으나, 이내준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되레 제대로 짚어냈다는 확신에 기묘한 승리감이 일었다. 최대한 무미건조한 얼굴을 유지하며 이내준은 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개중 아무 페이지나 열어 주은성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주은성의 전투 습관이나 특성 따위가 빼곡하게 정리된 메모장이었다. 주은성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이내준이 말했다.
     “파트너에 대한 사전 조사는 해둬서요. 그쪽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현재에 대해서는 제가 더 전문가일 수도 있어요. 전투 중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라던가, 습관 같은 것들이요.”
     상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메모장에 나열된 활자들을 빼먹지 않고 읽던 주은성은 이내 허, 하고, 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어쩐지 낯은 이전보다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불쾌감과 비아냥이 혼탁하게 뒤섞인 웃음을 한 채 주은성이제 앞에 들이밀어진 수첩을 뿌리쳤다. 이내준의 손이 휘청거림과 동시에 수첩이 직선을 그리며 지면에 추락했다.
     “저를 잘 알아서 좋으시겠어요?”
     그것이 끝이었다. 주은성은 그 문장만 덜렁 내뱉고서는 다시 뒤돌아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이내준을 따돌리려는 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주은성의 뒷모습을 이내준은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떨어진 수첩을 주운 뒤 주은성이 있던 자리로 시야를 옮겼다. 그새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여태 느껴본 적 없던 당혹이 이내준을 강타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라이 아냐?”
 
 
 
 

*

 
     주은성은 적막으로 가득 찬 게이트를 걷는다. 빠르게 걸음을 옮긴 덕분인지 뭔지, 질리도록 뒤따르던 인기척은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그 공허가 되레 마음에 들었다. 억지력에 의해 붙여진 가이드 따위, 곁에 두어봤자 성가시고 방해될 뿐이었으니까.
     폭주하고 싶어서 그래요?
     이내준의 목소리가 기억 사이로 울렸다. 당국이 강제로 붙여주었다는 가이드는 그간 스치듯 만나온 임시 가이드들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 가신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가 지적한 자신의 망설임을 생각했다. 은연중에 행동을 멈추었던 무수한 시절을 생각했다. 간파당한 끝맛은 늘 좋지 않고, 뒤늦은 자각은 수치와 닮았다. 속속들이 떠오르는 전투 상황을 머리에서 지워내기 위해 애써 고개를 떨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쉽사리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폭주라는 단어를 곱씹는다. 제 가이딩을 받지 않으면 폭주할 게 확실하다는 양 자만하던 이내준을 떠올린다. 그 문장 자체에는 반박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도.
     주은성을 울컥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그런 생각이었다. 센티넬이라는 틀은 운명과도 같다는 것이.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염없이 발버둥 쳐봤자 거부할 수 없는 소명이라는 것이. 지금도, 고작 가이딩 한 번 거부했다고 내딛는 걸음이 평소보다 무겁지 않던가. 뇌의 한 부근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모든 감각이 기민하게 쭈뼛 서서는 어디서라도 충전 받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주은성은 바로 이런 감각을 혐오했다. 자신을 벼랑 끝까지 내몬 감각이자, 생사의 기로 위로 수없이 던지는 감각이므로. 그저 적응하고 가이딩을 수용하라고 J는 말했었다. 그러나 주은성은 죽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애원하고 싶지 않다. 갈구하고 싶지 않다.
     삼촌, 저 너무 힘들어요.
     주은성. 자꾸 이럴래? 못 해준다니까?
     한없이 맹목적이고 초라한 모습이 되고 싶지 않다……
     바로 그때였다. 과거의 잔재로부터 불쾌감이 올라오려던 차에, 출처 불명의 위기감이 주은성의 온몸에 엄습했다. 주은성은 이를 잘 안다. 쉴 새 없이 게이트를 굴러왔으므로 그 윤곽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의 성대로는 결코 낼 수 없는 괴이한 음역의 소리, 어딘가 부자연스러우나 분명히 위협적인 동작들, 거대하고 압도적인 크기, 상대를 향한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인간 외의 존재.
     크리쳐.
     주은성에게는 지독한 불운이었다.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충분히 받았다면 모를까, 기어코 거절하고 온 감각이 예민해진 지금 상태에서는 능력을 사용해도 잡아먹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죽을 위기를 느낀 몸이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낼 듯 반응했으나, 동시에 결핍을 느낀 감각들은 언제라고 무너질 수 있을 것처럼 위협적으로 진동했다. 그러나 다른 수가 있던가? 재빠른 크리쳐의 동작을 인간의 몸으로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은성은 제 오만과 능력에 모든 것을 걸었다. 최대한 호흡을 정제하며 몸에 도는 불의 기운을 느꼈다. 이론적으로는, 위급한 상태에서도 극도로 조절하면 폭주를 피할 수 있었다. 주은성은 자신이 그 이론적 행운에 놓이기만을 소망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불을 내뿜었다.
     “아, 씨발.”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크리쳐에게 어마어마한 불길이 향함과 동시에 통제되지 않은 고온의 그것이 주은성의 전신에 파고든다. 뜨겁고, 두렵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아득하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모든 감각은 어디라도 자신을 구원할 것을 찾아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언제나 돕는 사람은 없다…
     마치 끝없이 되풀이되는 불행처럼
     끔찍이도 익숙한 화마가 몸을 뒤덮는 순간
     “주은성 씨!”
     거센 호명이 귓전에 파고들었다. 저와 비슷한 크기의 몸뚱이가 와락 등 뒤로 덮쳐왔다.
     크리쳐가 불길에 휩싸여 혼란해 하는 동안, 얽힌 두 인영이 그대로 뒤로 넘어진다. 맞닿은 신체 너머로 안온과 안정이 깃들었다. 구원을 인식한 몸이 본능적으로 제게 오는 에너지를 그대로 흡수한다. 그에 취해있기도 잠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은성이 빠르게 자신을 감싼 몸뚱이를 뿌리쳤다. 시선을 돌린다. 그을린 자국이 여실한 피부와 옷가지 따위가 눈에 들었다. 아득함에 이를 지적하려는 순간 상대 쪽이 먼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거센 다그침이 주은성에게 닿았다. 주은성 씨!
     “당신 미쳤어요?”
     주은성으로서는 참 기가 차는 문장이었다. 이내준의 팔에 새겨진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나가서 고칠 수는 있는 건가. 주은성이 오만상을 지었다. 마주 항변했다.
     “당신이야말로 미쳤어요? 불에 타서 죽을 일 있어요?”
     “안 죽으려고 한 거예요.”
     “뭐요?”
     “그렇잖아요? 애초에 그대로 뒀으면 폭주였고, 그럼 여긴 온통 불바다가 되고, 그럼 당신도 죽고 나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모두가 죽는데, 이게 제일 낫죠. 혼자 죽는 거면 차라리 몰라. 주변까지 불살라서 전부 죽일 생각이세요?”
     잠시의 고민도 없이 쏟아지는 문장들에 말문이 막혔다. 그 찰나의 정지 속으로 이내준이 잽싸게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고분고분하게 구세요. 살고 싶으면.”
     그런 말과 동시에 이내준이 주은성의 팔을 잡았다. 접촉과 동시에 날뛰던 신체가 거짓말처럼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이딩에 이토록 고분 고분한 몸뚱이에 절로 허탈한 마음이 차올랐다. 주은성이 쓰게 웃었다.
     “그냥 다 같이 죽죠? 것도 괜찮네.”
     자조로 가득한 목소리. 그에 이내준의 시선이 이전보다 더 진득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전에 보니까 주먹으로도 가이딩이 가능하더라고요.”
     “그거 저 때리겠다는 말씀이세요?”
     “아뇨? 하지만 이대로, 말마따나 다 같이 죽자고 폭주 위험 상태로 달려가시면 때릴지도 모르겠네요.”
     “어이가 없네…….”
     “여하튼, 그런 말 함부로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서 감옥 가도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글쎄요? 근데 전 감옥도 나쁘지는 않아요.”
     충분하다. 그런 느낌이 들자마자 주은성은 이내준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기지개를 켜며 얼굴 가득 짓는 웃음은 밝고 선명했으나, 참 기이하게도, 어떠한 희망의 기색도 담기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많아서.”
     “네?”
     “뒤로 비켜요. 화상에 모자라 통구이까지 되고 싶은 건 아니죠?”
     그 말만을 남기고 주은성이 전진했다. 아직도 제 몸에 붙은 불을 사로잡기에 바쁜 크리쳐를 향해 다시금 정제된 불길을 내뿜었다. 크리쳐의 포악한 비명이 들려온다. 괴롭게 몸을 떠는 크리쳐의 모습에 주은성이 주춤한다. 하나 그도 잠시, 결연한 낯으로 크리쳐에게 달려든다. 언젠가 보았던 동영상과 똑같은 전투의 과정이었다. 이내준은 그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주목한다. 이전의 대화와 태도를 되짚는다. 오랜 세월을 산 것도 아니면서 세상사에 전부 통달한 것처럼 구는 것, 매사에 자조와 허무를 담으며 살아가는 것,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깃든 인간 불신과 미묘한 자기혐오 따위를.
     키에엑. 만화 영화에나 나올 것만 같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크리쳐가 주은성의 마지막 일격을 받고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침내 이내준은 결론지었다.
 
     주은성 이 자식은 진짜…
     실력만 좋은 애새끼다.
 
 
 
 

*

 
     어이가 없네.
 
     주은성이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느낀 첫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화상 치료가 여간 요란했는지 얼굴까지도 덕지덕지 거즈와 밴드 따위를 붙인 모습이 흉하고 우스웠다.
     요란했던 첫 가이딩도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이후 며칠이 지나도 얼굴을 보이지 않기에 떨쳐내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이 실현된 줄로만 알았건만, 오산이었다. 이내준은 화상 치료를 끝내자마자 주은성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파트너 간의 원활한 친목 도모’라는 웃기지도 않은 목적 아래 만들어진 공동생활 공간 속에.
     치료하느라 입주가 늦었네요. 이내준은 그 문장만을 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서서는 방 곳곳에 제 짐을 풀었다. 누가 봐도 ‘나 환자요.’하는 모양새로 부산히 돌아다니는 꼬락서니가 마뜩잖았다. 주은성이 팔짱을 끼고 아니꼽게 이내준의 궤적을 시선으로 좇았다. 빈정거리며 물었다.
     “자업자득인 건 아시죠?”
     저는 오지 말라고 했어요. 변명과 정당화 언저리에 놓인 첨언에 마침내 이내준도 헛웃음을 뱉었다. 그가 정리하던 짐을 바닥에 내려두고 주은성과 시선을 마주했다. 곧고 단단했다. 꼭 첫 만남에서의 그것과 같이.
     “누가 보면 제가 되게 주은성 씨한테 절절매는 줄 알겠네요. 죄송한데, 저도 일이라서 한 거예요. 그쪽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일이니까. 그쪽이 가이딩 받기 싫다고 제 일자리를 뺏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예. 어련하시겠네요.”
     “…그렇게 감정적으로 구는 거 딱히 어른스럽게 안 보여요.”
     “하하, 그래요? 어릴 땐 애늙은이 같단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이런 소리를 듣네요. 사춘기가 늦게 왔나?”
     삐뚤게 웃어 보이기도 잠시, 주은성은 이내준과 짐을 번갈아 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무거울 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주은성은 그런 사람이었다. 상대를 한심하게 보면서도 자신으로 인해 상처 입은 이를 마냥 외면하지는 못했다. 갈등 섞인 숨을 뱉은 주은성이 곧 걸음을 옮겨 이내준의 짐을 도맡아 들었다. 저쪽으로 옮기면 되죠? 눈을 흘기면서 묻자 이내준이 당혹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혹을 자세히 살피고 싶지 않아 곧장 다시 시선을 돌렸다. 주은성은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이내준의 방 한편에 짐을 내려두고서는, 곧 손을 털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이내준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또 달려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일이라도 처신은 알아서 잘 좀 하세요.”
     그리고 이내준은 그 비아냥 속에서 주은성의 온기를 본다. 한 줌 걱정을 입 밖으로 꺼낸 주은성은 빠른 걸음으로 이내준을 지나쳐 사라진다. 이내준은 붙잡지 않고 다만 그 문장을 곱씹고만 있었다. 빈정거리는 어투일지언정, 본질은 걱정이자 잔소리였다. 물론 고작 그 한마디로 지금껏 보여준 주은성의 모든 싸가지가 무마되는 것은 아니었다만.
     상식 정도는 존재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메모장을 꺼내 든다. 빼곡하게 적힌 주은성의 습관과 마찬가지로 빼곡하게 페이지를 채운 주은성에 대한 악평 아래, 세 어절을 추가했다.
 
     의외로 여린 마음?
 
     이내준은 정에 취약한 사람들이 때때로 가장 날 선 형태를 띠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가세요.”
     “싫은데요.”
     “가시라니까요.”
     “일이라니까요?”
     “아니… 이내준 씨, 그때 제가 한 말 기억 못 하세요?”
     “기억해요. 주은성 씨는 제가 폭주할 수 있다고 한 걸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지만.”
     “돌아버리겠네…….”
     어느 게이트 한복판에서 주은성이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분명히 며칠 전의 종용 후로는 따르지 않으리라 확신했건만, 저 성가신 가이드는 계속해서 주은성의 뒤를 따르며 보조하려 들었다. 익숙지 않았다. 임시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던 시절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게이트 속에서의 협업이 아닌 게이트 공략 전후로 가이딩을 받는 방식으로 가이딩이 이루어졌으니까. 현재 이내준이 행하고 있는 방사 가이딩이나, 그가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면서 권총으로 크리쳐를 처치하는 모습 같은 것들은 전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려 들면 일전의 폭주 위기를 언급하며 주은성의 걸음을 멈췄고,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다 보면 뒤에 서 크리쳐들과 고군분투하는 이내준의 모습 따위가 마음에 걸렸다.
     하나 주은성은 그를 전부 토로할 정도로 이내준에게 정직하지 못했기에 그저 거부하는 방법 외에는 유별난 계책이 없었다. 그러나 주은성이 완고하게 거부하면 할수록 이내준은 더 끈질기게 주은성의 뒤에 따라붙었다.
     “안 피곤해요?”
     “뭐가요?”
     “이렇게 악착같이 따라오시는 거, 본인도 성가실 것 같은데요.”
     그렇게 물으면, 이내준의 대답은 늘 같았다.
     “…그럼 주은성 씨가 거부를 안 하면 될 일 아닐까요?”
     자연히 주은성은 의문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 이내준은…
 
 
 
 

*

 
     …뭐 하는 사람이지?
     제법 능숙하게 요리 기구 따위를 다루는 이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은성은 다시금 의문한다. 결코 해소할 수 없을 듯한 의문이었다.
     어째서 주은성이 이내준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가? 그것은 주은성의 잘못된 판단으로부터 시작된다. 게이트 속에서, 주은성은 이내준이 뒤따르는 모습을 계속해서 신경 쓰는 것보다는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게 이득이라 판단했다. 말마따나 ‘일’이니까. 일이라고 일컬어지는 반경을 벗어나면 이내준 역시도 성가시게 굴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오판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이내준은 주은성에게 물었다.
     저녁 먹죠?
     확신이 담긴 그 물음 뒤로, 요리사를 자처해서는, 2인분의 저녁을 만드는 것이다. 지나치리만치 태연자약하고 매끄러운 태도였으므로 무어라 막을 틈도 없었다. 그 결과 주은성이 이토록 어색하게 식탁 한 편에 앉아 이내준이 밥상을 차리는 것을 거들고 있지 않던가.
     반찬통과 수저 따위를 옮기는 일을 도우며 주은성은 이내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낯은 사무적이고 태연했다. 괜히 그 얼굴이 얄궂어 주은성은 물었다.
     “…이런 건 일이 아니지 않아요?”
     “뭐가요?”
     “이내준 씨. 가이딩 하러 온 거지, 제 수발 들으러 온 거 아니잖아요.”
     식탁 중앙에 찌개를 내려두던 이내준이 작게 웃었다. 묘한 불쾌감이 깃 든 웃음소리였다.
     “그럼 앞으로는 따로 먹죠. 두 명 먹을 거 하기 불편했는데 잘됐네요.”
     설마 차려둔 것까지 안 먹겠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핀잔의 의도가 명확한 물음에 주은성이 대답 없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돌연 수첩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은성이 떨떠름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 하세요?”
     “메모요.”
     “……메모요?”
     “말했잖아요? 파트너에 대한 사전 조사는 한다고요.”
     “지금은 ‘사전’이 아닌데요.”
     “앞으로 마주할 무수한 협업에 빗대면, ‘사전’ 아닐까요?”
     “그게 무슨,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뭘 적었는데요? 이런 걸 동의도 없이 메모하시면 안 되죠. 줘 봐요.”
     주은성이 식탁 위로 손을 뻗자, 이내준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순순히 그를 건넸다. 주은성은 수첩과 이내준을 꺼림직하게 번갈아 보고, 이후 수첩의 내용을 훑었다. 메모장을 넘길 때마다 빼곡하고 정갈하게 적힌 주은 성의 특성들이 속속들이 시야에 닿았다.
 
     크리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주춤거리는 습관이 있음
     말을 하다가 자신의 화상 흉터를 만지곤 함
     폭주 직전의 상황까지도 접촉과 가이딩을 거부하는 경향. 방사 가이딩 필요
     좀 애 같고 싸가지가 X
     ……
     의외로 여린 마음?
 
     “…….”
     메모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주은성의 낯빛이 더 노골적인 불쾌감으로 물들었다. 여러모로 기분 나빴던 첫 만남이 다시금 떠올랐다. 언제나 그러하 듯, 간파의 끝맛은 좋지 않다.
     “…매일 이딴 거 적으면서 저를 바라보셨구나? 와, 되게 음침하시네요.”
     주은성이 비꼬았으나, 이내준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되레 그 태연함이 주은성을 더욱 북받치게 했다.
     “태워버려도 되죠? 이내준 씨가 이걸 어디 팔아먹고 다니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
     “뭐, 그러세요. 근데 굳이 제가 그걸 이용할 정도로 주은성 씨가 저한테 의미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애당초 수락하지 않았어도 태울 심산이었지만 이토록 순순히 허락하며 속을 긁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진짜 밥맛 떨어지게 하는 데에 재주 있으시다.”
     여전히 불쾌감을 눈에 담은 주은성은 부러 필요한 것보다 큰 불길을 만들어 수첩을 태워버렸다. 채 먹지 않은 제 몫의 식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 일련의 동작을 마주하면서도 이내준은 어떠한 동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당당하다 이거지. 마음이 비틀린 주은성은 언제나와 같은 헛웃음을 머금고 종용했다. 이내준 씨.
     “그쪽이랑은 절대 친해지지 못할 것 같네요.”
     이후 곧장 몸을 틀어 제 방으로 향했다. 더 얼굴을 맞대다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극렬하게 화를 낼 것 같아서.
     이내준은 다만 그 모든 궤적을 바라볼 뿐이었다.
 
 
 
 

*

 
     뭐 하는 사람일까.
     이는 이내준의 의문이다. 말인즉슨, 주은성만큼이나 이내준 역시도 상대에게 수없이 의문하고 있다는 것.
     서로 첫인상이 좋지 않았고 이후의 과정 역시 다량의 불쾌감과 미묘한 신경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주은성이 자신을 신경 쓸 일 따위는 없다고 여겼다. 이내준이 주은성에게 무관심하듯 말이다.
     개의치 않았다. 지나치게 자신에게 절절매고 집착하는 센티넬과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지 이내준은 이미 충분히 체감한 바 있었으니까. 이내준이 일 운운하며 제공하는 가이딩 자체를 거부하진 않으니 그로 충분하다. 그저 서로에게 무신경하게 지내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주은성은 늘 이내준의 예상 범위 바깥에서 행동하는,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었다. 마치 다시는 이내준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 없다는 듯, 그날의 식탁 위에서 종용해두고서는, 함께 사는 공간을 떠나 나돌지도 않았고, 그 공간 속에서 이내준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처음 입주했을 때처럼 무언가를 옮기는 것을 돕기도 하고, 이따금 시선이 마주치면, “빨리 끝내죠.”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소리와 함께 손을 내밀고 가이딩을 요구했다. 그 주제에 접촉하는 과정 내내 싫은 티를 감추지 못했다. 게이트 내에서는 따라오는 자신을 성가시게 여기면서도, 이내준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 크리쳐를 태워 없애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토록 배려해주는 이유는, 가이딩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에게 신경하지 않는 데에 도가 튼 이내준으로서는 주은성이 자신에게 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전부 미련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미련하다는 감상이 조금씩 축적되는 순간마다, 이내준은 주은성의 손 위에서 재가 되어 흩어진 문장 하나를 상기했다.
 
     의외로 여린 마음?
 
     당시엔 그저 추측이었으나 이제는 확신이었다. 구태여 파고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은성은 생각보다 어리고, 생각보다 싹수없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각보다 따뜻하다. 인식한 뒤로는 마냥 주은성을 미워하고 방치할 수가 없었다. 되레 약하게나마 마음이 쓰였다. 그의 어린 나이, 세상의 풍파는 전부 겪은 듯한 태도 따위가 공연히 성가시고 안쓰러워서.
      상념을 떨치게 하는 것은 매캐한 냄새다. 화륵, 하고. 이내준이 디디는 걸음 앞에 놓인 크리쳐들이 다시 한번 불탔다. 앞을 바라보자, 모르는 척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주은성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고독했다.
      그리고 이내준은 그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이내준이 걸음에 박차를 가하여 빠르게 주은성을 따라잡는다. 곁에 다다르자마자 주은성의 시선이 이내준에게 향했다. 황당하다는 기색이었다.
      “…할 말 있으세요?”
      “아뇨. 같이 행동하면 좋잖아요.”
      “…….”
      모로 보나 주은성의 얼굴은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이내준의 말에 더 반박하지도 않았다. 이내준은 그 침묵을 핑계 삼아 주은성의 곁을 차지했다. 느리게 주은성의 옆얼굴로 눈길을 돌리면, 그의 눈가에 남은 선명한 화상 자국이 눈에 띈다. 주은성이 폭주 위기에서 실려 온 센티넬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렇다면 저 흉터에는 어떤 역사가 담겨 있을까.
      그 역사가 주은성의 온정을 가려버린 걸까?
      고찰은 길지 않다. 더 생각하기도 전에 섬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크리쳐의 기운이었다. 이내준이 다급하게 인기척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겼다. 드물게 보이는 섬뜩한 모습의 크리쳐였다. 인간의 장기와 유사하게 생긴 것들이 기괴하게 얽혀 그야말로 끔찍한 모양새를 한……
      “저기, 뭐 하세요?”
      …그리고 바로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이내준은 자신 이 무의식 중에 주은성의 시야를 가려 흉측한 모습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 했음을 깨닫는다.
      “…지금 설마 제 눈 가려주신 거예요? 크리쳐 보지 말라고? 가이드가, 센티넬한테?”
      황당무계함이 역력하게 묻어나는 물음이 다가오자 곧장 수치가 차올랐다. 멋쩍은 티를 애써 숨기며 이내준이 손을 거뒀다. 순순히 인정했다.
      “……동생 같아서요.”
      “동생이요?”
      “아니, 애초에 센티넬이라고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법은 없잖아요.”
      “허….”
     혹과 허탈함이 뒤섞인 숨.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으나, 다음의 동작은 그 범위 밖이었다. 주은성이 방금의 이내준과 같이 손바닥으로 그 시야를 가린 것이었다.
      “저는 됐고요. 그쪽이나 유약한 마음 잘 챙기세요.”
      빈정거림 아닌 나직한 웃음이 어린 문장이었다. 이내준은 제게 주어진 이 뜻 모를 암막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그마한 화상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한 손바닥 너머로, 무언가 타는 향이 진동했다. 다 태웠어요. 작고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시야에 빛이 찾아든다.
      이내준은 주은성이 보여주는 이러한 다정함이 여러모로 익숙지 않다. 마주한 인연 중 누구도 이런 모순적인 온기를 보여준 적 없었으므로. 하나 정작 그런 온기를 베푼 주은성은 당연한 행동이라도 한 사람처럼 태연했다. 미처 타지 않고 꾸물거리는 징그러운 잔해를 바라보며 혀나 차고 있을 뿐.
     런고로 주은성은 어려웠다. 쉽사리 규정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메모 장에 끄적거린 활자 몇 개로 판단하기엔 지나치리만치 다채롭다.
      이내준이 그런 물음표를 품에 안고 주은성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돌연 시선을 이내준 쪽으로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총은 있죠?”
      물음과 함께 주은성이 손을 내밀었다. 이내준은 반사적으로 손을 잡고 가이딩을 흘려보냈다. 그간 실행한 숱한 가이딩이 그러하였듯, 이번에도 그 동작을 빠르게 가이딩하고 끝내자는 뜻으로 해석했으므로.
      그러나 오판이었다. 힘을 전하기 시작하자 주은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주한 시선 사이로 당혹이 전해졌다.
      “……뭐 하세요?”
      그제야 이내준은 무언가 잘못 해석됐음을 깨닫는다. 다급하게 손을 떼어냈다. 곧장 수치가 밀려들었다.
      “가…이딩하라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총 달라고요. 태우는 것보다 쏴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생각해보니 총도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주은성이 웃으며 첨언하고서는 크리쳐의 잔재를 신발로 짓밟았다.
      그 사이 이내준은 후회와 자책을 거듭했다. 평소였더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인데, 하필 주은성의 온기를 규명해보겠다고 고집하다가 더없이 민망한 꼬락서니가 되어버렸다. 갈피를 잃은 두 손이 서로 엉켜 의미 없는 궤적을 그렸다. 얼굴에 열이 몰렸다.
      드물게 재미라도 느꼈는지, 뭔지. 주은성이 낮게 웃었다.
      “참나. 길들기라도 한 거예요?”
      그런 물음을 내뱉었다. 그저 스치는 말일 수도 있는 문장이었으나, 이내준은 그에 긍정했다.
      “…그런가 보죠.”
      이내준은 이제 마냥 주은성을 외면하지 못했다. 달리 표현하면, 길들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사실 계약 기간 끝날 때까진 길들어도 상관없잖아요. 그게 이득일 수도 있고요.”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주은성의 눈이 다시금 크게 뜨였다. 변명처럼 늘어놓은 이내준의 말에도 답 없이 오래간 침묵할 뿐이었다. 그는 신발 밑의 잔재를 더 강하게 짓밟더니, 느지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요.”
      “…….”
      “저야 좋네요. 길드는 쪽보다는 길들이는 쪽이 나아서.”
      땅바닥에 신발 굽을 비비며 주은성은 그렇게 말했다. 이내준은 문득, 주은성의 흉터를 또다시 생각했다.
      “…누가 겁도 없이 S급 센티넬을 길들이려 했나 봐요.”
      나직하게 호응하자 주은성의 눈길이 이내준의 낯에 닿았다.
      “글쎄요. 그때는 제가 호구처럼 보였나 보죠.”
      그 대답의 끝이 어쩐지 씁쓸해서, 이내준은 그 문장을 조금 더 헤집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주은성은 더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는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문장을 마무리하고, 돌연 이내준에게 물었다.
      “그쪽은 귀찮은 센티넬 없었어요? 아, 저 말고.”
      언젠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었다.
      “…있었죠.”
      덤덤히 인정하며 이내준은 목을 가린 옷을 조금 더 끌어 올렸다. 가려진 흉터 따위가 공연히 아렸다.
      “생각하면, 주은성 씨가 낫네요. 불필요한 가이딩을 받으려 난동 피우는 것보다야 가이딩 거부가 낫죠.”
      자조하듯 말하자 주은성의 시선이 짧게 이내준의 목에 닿았다. 무언가 짐작한 듯한 낯이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 목티만 입고 다니셨네요?”
      또한 물음보다는 어떠한 확신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거든요.”
      이내준은 다만 그런 답변을 내뱉었고, 주은성은 미묘한 의문을 낯 위에 띄우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딱 그 정도의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

 
      하지만 잘 엮인 옷자락만으로 가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야, 내준아. 오랜만이다.”
      그것은 결코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아니, 예상하고 싶지 않은 만남이라고 칭해야 할까 맞을까.
      “아는 사이에요?”
      주은성의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옆에서 울렸으나 차마 답하지 못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한없이 넓은 본부 건물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주은 성과 함께 있을 때 P를 마주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제 과거를 모조리 빼다 박은 얼굴을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새삼스럽게 목의 흉터가 아렸다.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무작정 고개를 숙이자, 상대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준은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들이켰다. 조롱과 분노 따위가 혼탁하게 섞인 저 웃음 뒤로 어떠한 것들이 찾아들었는지 여즉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 눈을 피해. 너도 떳떳하지 않은 건 아나 보다?”
      “…….”
      “이쪽은 이내준 새 가이드?”
      “…아, 예. 주은성입니다.”
      “좋겠다. 그 쪽한테는 꼬박꼬박 잘해주나 봐요. 서운하다. 나한테도 그렇게 해주지, 왜.”
      가벼운 목소리와 동시에 어깨에 P의 손이 닿았다.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잔인한 기억들이 파고들었다. 곧장 소스라치며 그 손을 뿌리치자 P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침잠했다. 그가 다시금 손을 뻗으려 들었다. 저런 낯을 한 P가 손을 뻗는 의도야 뻔했다. 이내준이 익숙하게 눈을 감고 순간을 감내하려는 그때,
      “잠시만요.”
      널따란 등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언제나 자신보다 앞서던, 그러나 자신을 신경 쓰던 녹색의 뒤통수에 P의 형상이 가려졌다.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지나가는 사람한테까지 시비 트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저희는 지금 이런 짓 받아줄 시간이 없어서요.”
      단호한 축객령과 함께 주은성은 P의 손목을 잡고 벽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토록 두렵게만 보이던 P가 종이 인형처럼 휘청이며 밀려나는 꼴이 익숙지 않아 이내준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나 그도 잠시. “가요, 내준 씨.”라는 목소리와 함께 제 손목을 끌고 이끄는 주은성의 모습에 상념은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괜찮아요?”
      한참 멀어진 끝에야 주은성이 이내준을 살폈다. 이 다정하고 확실한 친절에 이내준은 다시금 의문이 차오른다. 최악이라고 종용할 땐 언제고 이렇게 잘해주는지,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고작해야 전 파트너일 뿐인데 그리 딱딱하게 굳은 모습을 보인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주은성의 얼굴이 떠오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신에게로 기울던 그 시선이 떠오른다.
      아득한 탄식이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민망함과는 별개로 어쨌거나 주은성은 제게 도움을 제공한 사람이다. 특히 이번의 것은 과거와 같이 그저 물음표로 남겨둘 수만은 없는 호의였다.
      “……고마워요.”
      그런고로 괜찮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그런 문장이나 덜렁 내놓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주은성의 얼굴에 옅은 의심이 깃들었다. 떨떠름 함과 당혹, 경악 따위가 뒤섞인 눈초리는 곧 너그럽게 풀어졌다. 주은성이 나직하게 웃었다. 장난스럽고 상냥한 울림이었다.
      “와, 이내준 씨한테 그런 말도 듣네요. 역시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하나 봐요.”
      그런 말을 듣자 다시금 부끄러운 마음이 치밀었으나 이내준은 꼿꼿하게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단하게 눈에 힘을 주고 마주했다. 그조차도 우스웠던 건지 주은성이 다시금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았다. 그 마음의 흐름을 인지하고 이내준은 덤덤히 인정했다.
      더는 주은성이 고깝지 않았다.
 
 
 
 

*

 
      상처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상처를 빠르게 인식하고, 그런 사람에겐 쉽게 상냥해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주은성은 이내준과 자신이 그런 관계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주은성은 이내준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으나, 이내준이 상처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엔 도저히 냉담하게 굴 수 없었다. 어느 날 게이트에서 보여준 묘한 태도라던가, 복도에서 마주한 정체 모를 센티넬과의 만남에서 드러낸 지나치리만치 유약한 모습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이내준 또한 어딘가에서 상처 입은 사람이라는 것의 증빙이었고, 주은성은 어쩔 수 없이 이내준에게 온기를 품었다. 그는 가혹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과거에 남은 상흔이 현재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지독하게 잘 아는 입장이기에 더더욱.
      “그래도 주기적으로 가이딩 받긴 했나 봐요?”
      의료 차트를 손에 든 J가 맞은편에 앉은 주은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은성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이내준을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이내준의 가이딩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것도 오랜 일이다. 하나 J는 그런 지점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하긴, 안 받으면 폭주하니까 어쩔 수 없긴 했겠네요.”같은 중얼거림이나 내뱉었다.
      “가이드랑 사이는 괜찮고요?”
      “아, 나름요.”
      “어라. 그래요? 은성 씨가 사실 가이드 바꿔 달라고 하실까 봐 몇 명 가이드 명단 가져오긴 했거든요. 그럼 필요 없으려나?”
      J가 누군가의 증명사진과 인적 사항이 기록된 서류철 몇 개를 테이블 위로 늘어놓았다. “둘러보기만 해도 되고요.” 그런 첨언은 주은성이 가이드를 바꾸고 싶어 하리란 확신을 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주은성은 그 확신을 부정했다.
      기꺼운 손길을 두고 구태여 불쾌 한 손길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J와 눈을 마주하고 단언했다.
      “…지금 가이드랑 계속할게요.”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스미고 있었다.
 
 
 
 

*

 
      여하튼 간에 그랬다. 이젠 이내준과의 게이트 동행이 성가시지 않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스미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주은성은 제법 이내준이 편해졌다. 말인즉슨 이렇다. 들어가자마자 낭떠러지를 보여주며 절망감을 선사하는 싹수 실종 게이트에도 좌절하지 않고
      “잠깐 실례할게요.”
      라며 이내준의 몸뚱이를 안아 올릴 정도로는 편안해졌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공주님 안기 자세에 이내준이 거부의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능력도 없으면서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심산이냐는 주은성 의 논리적 반박에 그대로 꺾였다. 그냥 업으면 되지 않냐는 문장은 그럼 다시 내렸다가 업힐 거냐는 물음에 꺾였고. 그 결과 어설프고도 낭만적인 자세가 완성되었다. 속에서 이내준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이 나이 먹고 이렇게 안길 줄은 몰랐는데요.”
      그 농담은 이내준 역시도 주은성을 편히 여긴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주은성은 나직이 실소했다. 맞죠.
      “가만히 안겨 있기 그러시면 이참에 가이딩이라도 하시던가요.”
      “그거 좋은데. 음.”
      이내준이 주은성의 낯을 훑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주은성은 영문 모른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왜요?”
      “잡을 곳이 마땅히 없어서요.”
      “…그러네요?”
      두 사람 사이로 찰나 정적이 흐른다. 주은성은 제 손으로 단단히 떠받친 이내준의 몸이 느리게 경직되었다가 풀어지는 것을 느낀다. 몸이 이완 되고 나면, 이내준이 어딘가 결연한 낯으로 주은성에게 물어온다.
      “그럼 이건 어때요?”
      이내준이 주은성의 뺨 한 편에 손을 대었다. 볼에 느껴지는 생생한 감촉에 주은성이 너털웃음을 뱉었다.
      “…무슨 뺨이라도 맞는 자세 같은데요?”
      “그러니 빠르게 내려가셔야죠.”
      “아하, 알았어요. 손 떼지 마세요.”
      주은성이 또다시 웃는다. 그가 힘차게 발을 박차고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들었다. 낙하하는 두 인영의 양옆으로 시원한 바람이 스친다. 주은성은 절벽 사이사이로 보이는 디딜 틈을 놓치지 않고 중간중간 그런 곳들에 발 을 대어가며 안전히 아래로 이동하면서도, 이내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제법 공을 들였다. 이내준 역시도 주은성에게 가이딩을 흘려보내는 데에 열중했다. 허공에서 몇 차례나 시선이 뒤집히고, 얼마나 시원하고 강한 바람을 맞았을까. 곧 적당한 충격과 함께 주은성이 땅에 단단히 발을 디디고 이내준을 내려주었다. 급박하고 요란했던 추락의 여파가 남은 건지 이내준이 휘청인다. 주은성은 시선에서 이내준을 놓치지 않고 그 허리에 손 뻗어 지탱한다.
      “아, 감사해요. 이거 진짜 어지럽네요.”
      “너무 나약하시네요. 그렇게 험한 운전도 아니었는데.”
      “참나. 완전 많이 흔들렸거든요. 승차감 별로예요.”
      “그래도 객사보다는 낫잖아요.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하죠? 가이딩도 되고 좋네요.”
      “하하, 이제 거부 안 하시는 거예요?”
      “아, 진짜 한참 지난 얘기로 이러는 거 아니…… 잠시만요, 내준 씨.”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주은성의 얼굴이 돌연 뻣뻣하게 굳었다. 자못 달라진 표정에 이내준의 가슴에도 위기감이 엄습한다. 주은성이 이내준의 손을 끌어 제 뒤로 보냈다.
      “이거, 처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느끼긴 했는데….”
      주은성의 뒤통수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 이내준은 주은성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의 원인을 인지한다. 크기는 작으나, 얼핏 보기에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크리쳐 무리가 멀리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떼를 지어 달려드는 모습이 먼지처럼 자욱했다. 절로 두려운 마음이 차올랐다. 제아무리 S급이라도 저 많은 수를 자신까지 신경 써가며 처리하는 게 가능하던가?      
      “……은성 씨, 가이딩 얼마나 됐어요?”
      이내준이 주은성의 옷자락을 잡고 물었다. 주은성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다 된 건 아니고.
      “전자기기에 비유하면 60퍼센트 정도요. 처리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멀리 떨어져 계세요.”
      “싫어요.”
      “네?”
      “수가 너무 많잖아요. 엄호할게요.”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준 씨는 가이드예요.”
      “가이드여도 전투 훈련은 받아요.”
      “하지만 능력이 없잖아요. 아까 절벽도 제가 도와서 내려갔으면서?”
      “크리쳐 처리는 저도 어느 정도 해요.”
      “하, 그래도요….”
      “그럼.”
      그러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충동이었다. 막대한 양의 크리쳐들이 쏟아져나오는 상태에서 파트너를 염려하는 마음이 앞서 이성적 사고가 통제됐고 걱정과 즉흥만이 이내준을 조정한 결과였다. 이내준이 손을 뻗어 주은성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긴다. 얼마 나지 않는 키 차이는 손쉽게 주은성의 얼굴을 이내준의 얼굴 가까이 끌어온다. 갑작스러운 이내준의 행동에 주은성은 미처 대처하지 못한다. 이내준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무턱대고 제 낯을 들이민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침투한다…
      처음으로 행하는 입맞춤은 낭만이나 성애를 담고 있지 않았다. 되레 응급 처치를 하는 의사의 그것처럼 긴박하고 다급할 뿐. 그럼에도 미묘하게 의식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이런 상황을 마주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말캉거리는 살갗이 맞닿은 지 몇 초. 주은성이 당황하며 이내준을 약하게 밀어낸다. 얼굴엔 붉은 기운이 가득 감돌았다.
      “뭐, 뭐 하시는.”
      “빨리 가이드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은 어느 정도예요?”
      그 물음에 주은성의 정신이 퍼뜩 돌아온다. 몸 상태가 이전에 비해 훨씬 나았다. 평소에도 행동에 무리가 가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최상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단 한 번의 입맞춤을 통해 깨달았다.
      “……다 됐어요.”
      “…확실히 점막 접촉이 빠르긴 하네요?”
      “그러니까요….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 잠시만요.”
      주은성이 이내준의 어깨를 잡고 그가 조금 더 뒤로 무르게 했다.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이 전부였다. 주은성은 이내준이 본 적 없는 빠른 속도로 지척까지 다가온 크리쳐 무리에 파고들어 신속하게 그들을 태워내고 약간의 화상과 찰과상만을 남겨둔 채 이내준에게 돌아왔다. 쉽사리 믿기 힘든 재빠른 일 처리를 보자마자 생각난 것은 우습게도 가이드가 처음 되었을 때 보았던 교육 자료였다. S급 가이드의 경우, 최고 효율을 방출했을 때 그 효과는 한 도시를 쉽게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며……
      “…S급은 S급이네요.”
      이내준은 그런 소리나 뱉었다. 주은성도 제 역량을 확신하지 못했던 건지 민망한 웃음이나 지었다.
      “점막 접촉은 점막 접촉이고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 그, 음. 죄송해요. 급한 상황이라서.”
      “아니, 죄송할 건 아니죠. 가이딩…이니까요? 괜찮아요.”
      “그래도요. 평소엔 손잡기나 포옹으로도 충분하니까, 급할 때만 이렇게 하는 걸로 해요.”
      “하하, 이렇게 말했다가 되게 자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쁠 건 없죠? 가이딩이니까.”
      금방 주은성이 뱉어낸 문장을 되풀이하며 이내준이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주은성은 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떨떠름한 낯을 했다. 이내준이 마치 이러한 종류의 가이딩이 당연하다는 듯 구는 것이 공연한 의문이었다.
      “…이전 센티넬들이랑도 이렇게 하셨어요?”
     아… 아뇨. 잠시만요. 일단 앉아보세요.”
      주은성의 뺨에 난 상처를 계속해서 바라보던 이내준이 참지 못하고 그를 한쪽에 앉혔다. 응급 의료 키트를 꺼내 알코올 솜으로 그 상처를 소독하며 이내준이 말을 이었다.
      “……이전 파트너랑은 잘 안 해서 충돌이 좀 잦았어요.”
      나직한 목소리에 주은성은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복도에서 이내준에게 시비를 걸던 남성의 낯이었다. 그 당시 이내준이 보였던 지나치리만치 위 축된 태도가 번갈아 떠올랐다. 주은성은 자연히 그 ‘충돌’이라는 것이 상당히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를 띤 상황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때 그리 정중하게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스쳤다.
      “이런 가이딩하는 건 은성 씨가 처음이에요.”
      “……저도 이렇게 거부감 없이 가이딩 받는 건 내준 씨가 처음이네요.”
      이내준이 꺼낸 정직에 주은성이 덤덤히 같은 정직으로 대응하자, 내준이 마침내 작게 웃었다. 응급 상자에서 밴드를 꺼내 들어 주은성의 뺨에 단단히 붙여내며 이내준이 입을 열었다. 상냥한 말씨였다.
      “불쾌하지 않다면 다행이에요.”
      주은성은 이내준이 어딘가 열중할 땐 그 속눈썹까지도 경직되곤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리고 이내준은…
 
 
 
 

*

 
      이내준의 삶은 주로 포기와 체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릴 적 몸으로 만들어내는 궤적의 미학 따위에 관심이 있었으나 무용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을 깨닫자마자 관두었다. 가이드로 발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가이드의 길을 선택했다. 억지로 하는 접촉과 맞지 않는 상성의 파트너를 상대하는 일이 피로하다고 느껴도, 감히 그를 관둘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것은 무용처럼 돈을 빨아들이는 것 아닌 벌어들이는 종류였으니까. 다만 체념하고 안주했다. 그는 많은 삶을 떠받들 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성향이나 적성 운운하며 걸음을 무르기엔 자신이 지탱해야 할 수많은 얼굴들이 걸렸다.
      그렇기에 자신을 향해 가이딩을 종용하는 수없이 많은 센티넬들도 그저 참아내기를 택했다. 사회에 만연한 문장 하나만을 믿고 살았다. 버티면 된다. 버티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버티기만 하면.
      하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내준이 버텨내며 점막 가이딩을 거부하자 이내준에게 찾아든 것은 능력을 이용한 우악스럽고 잔인한 공격이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평소보다 예민했던 P의 얼굴에 대고 거절을 입에 담자마자 제게 날아든 날카롭고 섬뜩한 감각을.
      목을 향한 공격이라서 죽을 수도 있었어요. 빨리 온 게 천만다행이네요. 흉터는 남겠지만, 그 외 생활에 지장은 없을 거예요.
      의사는 그런 말로 이내준을 위로하려 들었고 다른 동료 역시도 이내준을 비슷한 문장으로 다독였으나 언제나 무감했다. 포기와 체념 끝에 남은 것은 결코 지워낼 수 없는 상흔과 고통과 기억이었다. 이내준은 다짐했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흘러가듯 살다가, 어느 정도 생활할 만큼 돈이 모이면 누구보다 신속하게 이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 것이라고. 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은 가벼워지는 일이 없었고, 본부는 이내준의 정신 건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신체가 회복되자마자 이내준에게 새로운 센티넬을 들이밀었으며, 그를 상처 입혔던 P는 단지 강하고 효율 좋은 센티넬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징계 없이 넘어갔다.
      삶을 둘러싼 모든 요소가 죄 환멸 나는 것들이었다. 새로운 센티넬들은 폭력을 사용하진 않았으나 모두 가이딩을 향한 지겹고 끔찍한 갈구와 묘한 강압을 띠고 있었으므로 거부감이 앞섰다. 먼저 혐오와 거부를 태에 두르니 어려울 일도 없었다. 이내준은 무신경하게 살았다. 그렇게 살아가면 될 일이라고 여겼다.
      저는 가이딩 안 받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생겼다. 주은성에게 무턱대고 입을 마주한 순간, 그 모든 행위에 어떠한 거부감도 없었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이내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뺨에 난 상처 위로 밴드를 덧붙이는 단순한 동작에서조차 심장의 고동이 오작동하는 이유, 주은성에게 자꾸 연민을 베풀게 되고 기울게 되고 스미는 이유, 상처를 핑계로 서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버린 이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은성이 특별했다.
      그리고 이내준이 특별하게 여긴 것은 언제나 끝이 좋지 않았다.
      무용을 생각한다. 그것은 이내준의 다리를 시퍼런 멍투성이로 만들고, 매일 한계까지 지치게 했으나 언제나 특별했다. 신체의 무리 따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했다. 현실의 벽은 언제나 높았고, 이상을 추구할 여유가 이내준에게는 없었다. 가장 큰 애정을 품었던 것을 가장 빠르고 손쉽게 포기해야 했던 기억은 이내준에게 다른 형태의 상흔을 남겼다.
      이내준은 주은성 또한 어떠한 모습의 무용이 될까 두려웠다.
      공포에 대한 해답은 짧다.
 
      그는 회피를 결정한다.
 
 
 
 

*

 
      “휴가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명분이었다.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휴가를 떠났다는 말에 영 납득이 서지 않아 이내준에게 몇 차례 연락을 보기도 했으나, 전부 무시당했다. 제법 즐거웠던 가장 최근의 게이트 공략을 뒤로 하고 이내준은 홀로 멀리 떨어졌고, 주은성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임시 가이드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능숙하진 않았으나, 이내준과의 관계가 꽤 순탄하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주은성 역시도 자각하고 있는 것 이었다. 생의 끝까지 가이드를 혐오하리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가이드를 편하게 느끼고, 되레 애정까지 가지게 된 대상은 사뭇 특별하고 소중했다. 그리고 이내준 역시도 비슷하리라고 여겼다. 망설임 없이 제 멱살을 끌어 당겨 입을 맞출 땐 언제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을 피한단 말인가.
      그의 회피 덕택에 한가지 깨달은 사실은, 이내준의 가이딩에서 느꼈던 편안함은 이내준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라는 것. 다른 가이드와 접촉하자마 자 느껴지는 불쾌감에 그를 거부한 지도 며칠. 주은성은 또 한 번 이내준 이 없는 게이트 앞에 섰다. 이내준과 함께할 땐 단 한 번도 두려워한 적 없던 입구였다. 농담 따먹기를 하며 웃었다면 모를까.
      그러나 이내준이 없는 지금, 게이트의 입구는 아주 아득한 과거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깊고 음습하고 불길했다.
      “이번 게이트는 되게 위험하댔어요.”
      “그래서 뭐요?”
      “가이딩, 필요하실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 붙이는 임시 가이드의 얼굴 위로 이내준의 낯이 겹쳤다. 폭주라도 당하고 싶은 것이냐며 빈정거리던 그 얄궂은 목소리가 어째서 이토록 듣고 싶은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지금 없고…
      “됐어요.”
      …모든 것은 오롯이 주은성의 몫이다. 주은성은 다만 또 한 번 자신의 행운에 생을 걸었다.
      그가 게이트 속으로 뛰어들었다.
 
 
 
 

*

 
      주은성은 운이 좋은 편이다.
      언제나 그랬다. 굴곡을 겪어도 탈출구가 늘 지척에 있었다. 폭주 위기 의 후유증으로 가이딩을 거의 거부하면서도 살아남았던 것은 그러한 주은성의 행운에 기반했다. 그런고로 주은성은 이번에도 자신이 살아남으리라는 오만을 품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조금 벅차더라도, 결국에는 승리가 찾아올 줄로 알았다.
      오산이었다.
      이미 충분한 가이딩에 익숙해진 신체는 며칠의 공백에 적응하지 못한다. 평소였더라면 별반 무리 없이 해치웠을 크리쳐임에도 능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날뛰었다. 모든 감각이 왜곡된다. 신체가 비정상적으로 기이한 형태를 띤다. 혈관 벽을 치는 피의 흐름이 무엇보다 선명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크리쳐가 다시금 괴성을 지른다. 주은성에게 달려든다. 주은성이 다시금 화마를 몸에 두른다. 무리 없이 해내야 했을 능력 시 전임에도 욕지기가 일었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린다. 폐부 깊숙한 데서 부터 기이한 불쾌감이 올라오더니 마침내는 또 한 번
      타는 냄새가 났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곧 숯처럼 어두워진다. 전신을 타고 화끈거리는 감각이 퍼져나간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분명 위급한 상황일 텐데도, 이상하게 눈이 감겼다. 의식이 멀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 명멸하는 정신 너머로 어떠한 소리가 들려왔다.
 
      ― 주은성 씨!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온도가 닿는다. 여린 살갗 위로 입술이 겹친다. 문득 벌린 입속으로 혀가 파고든다.
 
      이것은 최후의 기억이다.
 
 
 
 

*

 
      긴 악몽에서 해방되었던 것 같다.
      아니, 현실인가?
 
      주은성은 눈을 뜬다. 익숙한 순간이다.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언젠가 겪은 고통과 동일한 것이 허리를 짓누르며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몸을 눕히자, 딱딱한 침대 시트가 그대로 등에 닿았다. 누워본 적 있는 재질이었다. 의문보다도 빠르게 확신이 섰다. 폭주였구나. 어렴풋하게 닥쳐오는 기억을 떨쳐내며 다시 일어서려 들었다. 허튼짓 말고 누우라고 종용하듯 닥쳐오는 아릿한 느낌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인상을 찌푸렸다.
      “좀 더 누워 있어요.”
      그런 소리와 함께 이마에 손이 닿았다. 어떤 과거와 지독하게 닮음과 동시에 어딘가 서툰 동작이었다. 주은성은 느릿하게 제 이마를 미는 사람의 낯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내준이었다.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으나 반가움보다도 섬뜩한 마음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내준의 온몸이 붕대나 거즈로 덮여 있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은성은 자신의 불길이 얼마나 뜨거운지 생생하게 기억하므로.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들었다. 주은성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서서히 내려가던 상체가 튀어 오르듯 제자리를 찾는다. 주은성이 이내준 의 팔목을 낚아챘다. 감긴 붕대 틈으로 거뭇하게 타들어 간 살갗이 눈에 들었다. 절로 아득해졌다.
      “미쳤어요?”
      그것은 절박함과 분노가 뒤섞인 물음이었다.
     뭐가요?”
      “그런 상황에 달려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추후 일상생활에 지장 없댔어요.”
      “반쯤 미라 상태면서 지금, 없긴 뭐가 없다는 건데요? 애초에 게이트엔 어떻게 들어왔어요? 휴가였다면서요.”
      “……당신 파장이 이상하다고 연락해서 바로 뛰어온 거예요.”
      “누가요?”
      “J씨요.”
      “그렇다고 폭주 직전의 센티넬이 있는 게이트에 미쳤다고 들어가요?”
      주은성은 불현듯 언젠가의 매캐한 향냄새가 자신에게 파고드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새까맣게 타올라 시체조차 보전하지 못한 양친의 최후를 떠올린다. 당연지사 마음이 섬뜩해졌다. 일언반구 없이 떠났던 행위에 대한 배신감과 이내준을 죽일 뻔했다는 죄책감, 그토록 무모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에게 달려온 이내준에 대한 염려와 분노 따위가 복잡하게 얽혀 주은성을 괴롭게 했다. 이내준에게 주은성이 그러하듯 주은성에게도 이내준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은성은 더는 그런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저 말고 다른 센티넬 도맡는 건 어떠세요?”
      그러니 그것은 상대에 대한 애정에서 기반한 제안이었다. 주은성은 알 고 있다. 자신의 화마가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고통을 주는지, 이내준이 객기로 그를 버텨낸다고 해도, 추후엔 트라우마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이딩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주은성과 달리 이내준은 그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하나 그것이 어디 이내준에게도 같은 뜻으로 전달되었겠는가. 이내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한참이나 입을 뻐끔거리 던 이내준의 눈이 물기로 가득 찼다.
      “…내준 씨?”
      주은성의 물음이 도화선이라도 되었는지, 곧장 이내준의 뺨을 타고 눈 물이 흘렀다. 이내준이 붉어진 눈으로 주은성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눈동 자에는 역력한 배신감과 분노 따위가 어려 있었다.
      “그럼, 그럼 당신을 그냥 죽게 놔둬요? 불길에 휩싸여 죽게 둬요?”
      “…확실히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요. 살린다고 해도, 이내준 씨까지 산다는 보장 없었고요. 저 때문에 사람 또 죽으면 제가 좋다고 살아 갈 것 같았어요? 내준 씨한테 이렇게 피해 주고 제가 살았다고 즐거워할 것 같냐고요.”
      “그러는 저는요? 주은성 씨 죽으면 제가 뭐 기분 좋을 것 같아요?”
      “…….”
      “주은성 씨, 당신만 아픔을 지닌 사람처럼 얘기하지 마세요. 그거 오만 이에요.”
      잔뜩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항변하여 이내준이 돌연 제 목가를 가리켰다. 미처 가리지 못한 흉터가 선명하게 남은 목이었다.
      “왜 목티만 입고 다니냐고 물어봤죠? 가이딩 거부하다가 그 능력으로 공격받아서 그래요. 그 뒤로 계속 그 사람 피하고 있고요. 따지자면 똑같이 능력으로 피해 준 사람인데 제가 왜 주은성 씨는 안 피하고 그 사람은 피하겠어요? 저도 주은성 씨 생각하고 주은성 씨 좋아해요. 예전에 입은 상처는 기꺼이 외면하고 위험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러면 더더욱 저와 파트너를 하면 안 되죠. 저야 가이딩을 받으면 끝나지만, 이내준 씨는 그때보다 더한 상처를 얻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러기 싫어요. 이내준 씨한테 상처를 준 다른 사람이 주고 싶지 않은 거라고요.”
      “……제가 주은성 씨에게 계속해서 가이딩하는 이유는, 주은성 씨가 저에게 그런 상처를 남길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서 그래요.”
      그 말에 주은성이 침묵했다. 말문이 턱 막혔다.
      “그만큼 신뢰하니까. 실수로 낸 상처에 앓을 정도로 나약하지도 않아요. 주은성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한 사람 아니에요, 저.”
      “…….”
      “그런데 제가 베푼 신뢰와 애정의 결과가 이런 거라면, 네. 좋아요.”
      차마 시선을 마주하고서는 내뱉지 못할 문장을 혀끝에 머금은 채 이내준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꽉 쥔 두 주먹이 무릎 위로 진동했다.
      “끝내면 되겠네요. 휴가가 조금 길어졌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죠.”
      주은성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박차고 일어선 것은 이내준이었다. 그는 주은성의 낯에 조금의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은성은 고립된다. 분명 주은성의 제안대로 된 일이었건만, 어쩐지 하나도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당신만 아픔을 지닌 사람처럼 얘기하지 마세요.
 
      이내준의 상처받은 목소리가 생생하게 귀에서 맴돌았다.
 
 
 
 

*

 
      “…그렇게 끝났다고?”
      정기 검진하러 왔다가 그야말로 매일매일 썩어들어가는 주은성 표정이 마음에 걸려 ‘무슨 일 있냐.’ 한 번 물었다가 무자각 쌍방 게이 상담을 들어주게 된 J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경악과 충격과 어이없음.
      완벽한 타자인 J의 눈에는 미련한 두 남성의 감정이 뻔히 보였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애당초 휴가 떠난 가이드가 네 센티넬 수치 위험하다는 소리에 그렇게까지 다급하게 오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다. J는 이내준이 주은성을 진정시킨 그 날의 기억을 상기한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택하라는 경고를 들을 시간도 없다는 듯 뛰어들던 이내준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기억이 났다. 그런 이내준과 깨어나자마자 싸운 것도 모자라 회복이 진행되는 열흘 내내 연락하지 않았다니. 놀랄 노 자였다.
      “근데 주은성 씨가 좀 잘못하긴 했네요. 목숨 걸고 살려줬는데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긴 하죠?”
      “…저도 알아요.”
      “물론 이내준 씨도… 주은성 씨 입장 이해 못하고 무작정 자기 얘기만 쏟아낸 감이 있고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미치겠네. 편들어줘도 난리야.”
      의례적으로 양쪽 다 잘못 있다는 소리로 수습하려고 했건만 이내준에 대한 부정적 의견 표출하자마자 노골적으로 일그러지는 주은성의 얼굴에 J는 전의를 상실했다. 자기반성 자책 후회를 거듭하고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지고 있는 주제에 상담은 무슨 상담이고 토로는 무슨 토로인가. 그냥 달려가서 고백하고 입 맞추고 드라마처럼 끝내라…
      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인지라, J는 다만 난처하게 웃었다.
      “이내준 씨가 먼저 연락한 적은 없고요?”
      “네.” “주은성 씨는요?”
      “저도 연락 안 했죠.”
      “그런데 화해는 하고 싶으시고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럼 연락을 하셔야죠?”
      어이가 없네, 진짜로…. J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주은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처량한 센티넬은
      “……제 연락 안 받고 싶어 할 거예요.”
      라고 하며 씁쓸한 눈으로 창문만을 바라본다. 미칠 노릇이었다.
      “화해하고 싶은 쪽이 먼저 연락하셔야죠. 이내준 씨가 먼저 끝내자고 한 입장이라 그분이 먼저 연락하면 모양새가 이상해지잖아요. 지금 만나자고 하시든 뭐든 연락 걸어보세요. 어차피 이젠 외출도 자유롭잖아요? 전 이제 가볼게요. 더 떠들어도 제가 말하는 건 소용 없을 것 같아서.”
      그러고는 휑하니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주은성은 J의 조언 중 한 문장만을 곱씹는다. 화해하고 싶은 쪽이 먼저 연락하셔야죠. 스마트폰 연락처에 저장된 익숙한 열한 자리 숫자를 다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시간 동안 수없이 입력하다 지우기를 반복한 숫자의 나열이었다. 주은성은 잠시 마음속에서 두 가지 감정을 저울질했다. 연락받고 싶지 않을 사람에게 연락한다는 죄책감과 영원히 이내준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더 무거운 쪽은 너무도 자명했다.
      주은성은 수신 버튼을 누른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연결음이 한참이나 반복되었을까, 이내 뚝, 하고 연결음이 끊기며 한참이나 그리워하 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여보세요?
      수없이 생각했다. 만약 이런 기회가 생기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미안하다는 사과?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는 변명? 제발 다시 시작하면 안 되겠냐는 간청?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거듭과 거듭을 반복한 상념은 전부 사라진다. 주은성은 그저 홀린 듯이 제안했다.
      “…만나실래요?”
 
 
 
 

*

 
      이내준은 주은성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이거 마시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푸는 거예요.”
      본부 근처에 자리 잡은 조촐한 주점. 철제 원형 책상 위 버너에서 어묵 탕이 끓었다. 제법 능숙하게 술을 따라주며 이내준이 그렇게 종용했다. 주은성은 당혹과 환희가 미묘하게 섞인 낯으로 그에 응했다.
      지난 열흘의 시간은 이내준에게도 뚜렷한 고난이었다. 상대에게 품은 분명한 애정이 존재했기에 더욱 아렸다. 주은성의 과거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상처 준 것만 같아 주은성에게 미안했고, 도망친 주제에 갑자기 나타나서 말을 지껄였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고, 저 보다 나이 어린 상대에게 투정한 것만 같아 후회됐고, 또 자신을 그저 친애하기만 하는 듯한 주은성이 원망스러웠고, 자신이 어떤 감정과 결심을 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하는 주은성이 미웠고, 또…
      늘 진심을 입에 담는 것을 꺼리는 주은성의 본심이 궁금했다.
      그런고로 주은성의 연락은 이내준에게 있어 일종의 기회이자 결심이었다. 적어도 이내준은 이런 식으로 주은성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터놓고 말을 한 뒤 단순 파트너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이상으로 발전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의 생각이란 이러했다.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상대라면, 그리고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라면, 오랜 타개책을 사용하자. 그냥 알코올의 힘을 빌리자……
 
      그리고 이내준은 그 결심을 후회했다.
      “아니, 못 먹으면 못 먹는다고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이내준이 간과했던 것은 주은성의 주량이 예상보다 약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강하리라고 생각했건만, 주은성은 자신이 취기를 느끼기도 전에 만취해서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기가 찼다. 주량을 알 텐데도 그 지경까지 마신 주은성도, 그런 주은성을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도.
      밀려드는 허탈함에 몇 차례 자작하고 주은성을 수습했다. 어깨에 팔을 들쳐메고 계산을 마치고 술집을 나오는 모든 순간마다 주은성은 같은 말 을 중얼거렸다. 정말, 정말로.
      “짜증 난다고요….”
      나름 부축한 채 나가는 길까지도 그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어느 정도 알딸딸해진 정신은 이내준을 조금 더 무모하게 만든다. 이내준이 힘껏 주은성을 내팽개쳤다. 주은성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넘어진 주은성의 모습에 대고 이내준이 항변했다.
      “은성 씨가 뭐가 그렇게 짜증 나는데요? 바로 차여버린 제가 더 짜증 나거든요?”
      “아니…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뭐라고요?”
      “그렇잖아요. 성격 거지 같은 거 고치고 싶어서 신경 좀 쓴 건데… 그게 잘못이에요? 다 생각해서 바꾸자고 한 건데…”
      참아주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내준은 망설이지 않고 주섬거리며 일어나 려는 주은성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퍽. 커다란 타격음과 동시에 주은성의 고개가 돌았다.
      “배려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리고 다시 휘두른 주먹은 주은성의 손에 가로막혔다. 이내준이 찰나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다시 제 말을 이었다.
      “요구도 안 했는데 이딴 식으로 행동하는 건 신경 쓰는 게 아니고, 이기적인 거예요. 제멋대로 구는 거라고요. 그냥 나를 잃고 싶지 않아서 무서운 거잖아요. 아니에요?”
      주은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이내준의 멱살을 붙들었다. 불만 섞인 낯으로 대항했다.
      “그러는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뭐?”
      “내가 언제 보호해달라고 했어요? 저도 제 몸 간수는 알아서 할 수도 있어요.”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내준이 힘껏 비웃고서는 멱살을 뿌리치기 위해 주은성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손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손톱으로 주은성의 손등을 긁어내며 이내준이 외쳤다.
      “그래서 두 번이나 폭주하려고 하셨고요?”
      “애초에 센티넬인데….”
      “그게 뭐요? 저한테 간수니, 뭐니, 그런 같잖은 소리를 하고 싶으면 나 없이도, 센티넬이어도, 멀쩡하게 싸워야죠.”
      꿈쩍 않는 주은성의 포박을 떼어내려던 손에 절로 힘이 풀렸다. 이내준이 그 손등을 감싸 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멀쩡하게 있어야죠…….”
      애달픈 목소리에 동요라도 한 것인지 주은성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이내준을 바라보는 눈길은 길 잃은 미아처럼 혼란에 잡혀 있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바라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아녜요?”
      “…….”
      “정말 폭주 위험 없이 싸우는 걸 원하면 센티넬을 관둬야죠. 근데 그럴 순 없어요. 아시잖아요. 저도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 아는데, 어떡해요?”
      마침내는 주은성 또한 고개를 숙였다.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토 로했다.
      “해결책이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리고 정적이었다. 이내준은 주은성이 숙인 고개를 멍하니 바라본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주은성에게 느끼는 감정과 주은성이 자신에 게 느끼는 감정은 예상보다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이내준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맞아요. 바라는 거 있어요.”
      주은성이 고개를 추켰다.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맞물렸다.
      “…뭔데요?”
      “나서지 말라고는 안 할 테니까, 내가 구하는 건 눈감아주세요.”
      “…….”
      “은성 씨가 죽어가는 순간에 저 홀로 안전하게, 무력하게 있다고 생각 하면… 그게 죽음보다 두려워요.”
      “……알았어요”
      “…은성 씨는 저한테 바라는 거 있어요?”
      이내준의 물음에 주은성이 잠시 고민하는 낯을 했다. 그러다 곧, 있어요, 라고. 작게 답했다. 한참이나 우물거리던 주은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든 들어줄 테니까,
      “저 싫어하지 마세요….”
      동시에 이내준의 어깨에 그가 얼굴을 파묻었다. 이내준은 잠시 경직되었다가, 이내 엉거주춤하게 주은성의 머리를 껴안았다.
      “안 싫어해요. 좀 화나기만 한 거지,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처음에 싫어했잖아요…….”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지금….”
      “하하.”
      “웃겨요, 지금?”
      “그냥, 좋아서요…….”
      주은성이 헤실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두 시선이 맞물렸다. 자신을 향한 그 붉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 이내준은 기꺼이 무모해졌다. 입술을 맞댔다. 주은성은 그를 피하지 않고 되레 기꺼이 응수했다. 이내준의 목덜미를 붙잡고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타액이 질척하게 얽혀들었다. 한참 숨결을 공유하다가 곧 느지막이 두 얼굴이 멀어졌다. 주은성이 얼떨떨한 낯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왜 한 거예요? 가이딩도 아니면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물음이었다. 그래도 언젠가처럼 밉살맞은 질문까 지는 아니라서, 이내준은 다만 가볍게 웃었다. 먼저 몸을 털고 일어난 뒤 주은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정도는 스스로 생각하고, 일단 일어나요.”
      이내준은 내일의 아침은 유독 길지도 모르겠다고 예감한다.
 
 
 
 

*

 
      꿈이겠지.
      눈을 뜨자마자 스치는 기억들에 주은성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하나 자신이 이내준의 집에 있다는 확실한 사실과 머리가 띵한 와중에도, 그 부끄러운 기억들은 토씨 하나 빠짐없이 뇌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부정조차 불가능해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자 부산스럽게 부엌에서 움직이는 이내준이 눈에 들었다. 찰나 두 시선이 스치자, 이내준이 미묘하게 그 눈길을 피하며 물었다.
      “…해장국 먹어봤죠?”
      그 말에 끌려가듯 앉은 식탁 가운데로 북엇국이 놓였다. 김이 피어오르는 북엇국을 제 그릇에 담으며 이내준을 흘겼다. 어제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피어올라 주은성의 뇌를 어지럽혔다. 수치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기어오르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네?”
      “아니, 그, 그때 화낸 것도, 어제 추태 부린 것도….”
      이내준의 시선이 그대로 주은성에게 직격 했다. 이내준이 물었다.
      “저한테 정말 미안하세요?”
      “네….”
      “그럼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마세요…. 트라우마 생길 것 같네.”
      “………네.”
      이후 정적. 오직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주은성이었다.
      “…저 술은 어제 처음 먹어봤어요.”
      “예. 그런 것 같더라고요….”
      이내준은 주마등처럼 스치는 주은성의 모습을 생각하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염려를 담아 첨언 했다.
      “또 마실 생각이면 저 있는 곳에서 마시세요.”
      “어차피 이제…… 떨어질 일도 많이 없으니까… 같이 마시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럴지도요.”
      그리고 다시 정적이었다. 침묵 사이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그저 바라보 가만 있던 이내준이 돌연 숟가락을 내려두고 물었다.
      “……은성 씨도 저 좋아하세요?”
      물음과 동시에 주은성이 헛기침을 뱉었다. 콜록. 기침 소리 아래로 그 가 쥐고 있던 젓가락이 우습게 식탁 위를 나뒹굴었다. 그가 입을 가린 채로 되물었다.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잊어버렸나? 이내준이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떠보는 문장 하나를 뱉었다.
      “어제 은성 씨가 술 먹고 고백했잖아요.”
      “…네??”
      이번의 되물음은 그야말로 경악에 차 있었다. 주은성은 자신이 망각한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으나, 그런 기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르잖나. 자신이 기억하는 때보다 더 취해서 아예 암흑으로 들어간 기억이 있을지도…….
      “음, 농담이에요.”
      우려가 정점을 찍을 즈음 이내준이 뱉어낸 말은 그랬다. 주은성이 묘한 불신과 염려가 뒤섞인 얼굴로 물었다.
      “……농담인 거 맞아요?”
      “고백했으면 제가 이걸 끓여줬겠나요.”
      “아, 아아.”
      당연하게도, 그리고 정적이었다. 세 번째로 찾아든 침묵에 주은성은 그 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북엇국에 연신 숟가락질했다. 그 작태를 빤 히 바라보던 이내준이 느리게 심호흡했다. 그는 더는 답답한 관계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
      “근데 전 좋아해요.”
      이내준이 직진했다. 동시에 주은성이 아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요란한 헛기침을 뱉었다.
      “…예?”
      “은성 씨 좋아한다고요. 친애의 의미 말고, 연인으로 발전하고 싶은 마음으로요.”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들이며 이내준이 주은성과 지그 시 시선을 맞췄다. 한참이나 콜록거리던 주은성이 내뱉은 첫 마디는,
      “지, 지금 이렇게요? 저희 해장국 먹고 있는데요?”
      참으로 초라하고 우스웠다. 뜬금없는 소리에 이내준도 맥이 탁 풀렸다.
      “…그래서 싫으세요? 다른 곳에서 고백할까요?”
      “아, 아뇨.”
      주은성이 저도 모르게 즉답했다. 이내준은 그 즉답이 내포하는 바를 알았다.
      “그럼 지금 대답해주세요. 은성 씨도 저 좋아하세요?”
      던져진 질문. 기실 대답이야 뻔했다. 열흘의 공백과 어젯밤의 기억으로 주은성 역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자신이 이내준에게만 유독 취약해지고, 이내준의 가이딩은 마냥 괜찮았던 이유는, 단순한 신뢰나 친애로는 설명 할 수 없는 종류였다고. 자신과 유사한 상처를 지니고 있고, 자신을 이해해주고, 또 여러모로 무례하게 굴었던 자신을 포용해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첫 보호자에게 베푼 사랑은 불행한 사고로 파괴되어버렸고, 두 번째로 베풀었던 헤픈 애정은 주은성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으므로 주은성에게 있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어렵고 두려운 일이었다.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이를 만들었으나 모두 저를 사랑하기보단 이용하려 들었다. 자신을 보호한 국가기관도, 그 속의 사람들도, 그 밖의 사람들도.
      애정을 받지 못하는 사실만큼이나 애정을 줄 곳 없다는 사실이 아리고 쓰렸다. 사랑할 곳도, 사랑받을 곳도 없어 언제나 고독 사이를 자맥질하기 만 했다. 그러므로 이내준은, 주은성에게 다가온 어떠한 형태의 구원.
      “네. 좋아해요.”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받을 수 있는 터전이 생긴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부정할 수 없었다. 주은성은 이내준을 사랑한다. 이내준이 주은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태연함을 가장한 이내준의 낯 위로 숨길 수 없는 환희 따위가 깃들었다. 붉게 물든 귀로 한참 주은성을 쳐다보던 이내준이 마침내는 참지 못 하고 작게 웃었다.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더 로맨틱한 장소에서 다시 고백할 테니까 그때 받아주세요.”
       “그, 그땐!”
       마찬가지로 새빨간 귀를 한 주은성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난감하고 멋쩍은, 그러나 확실한 행복이 섞인 웃음을 띤 주은성이, 작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제가 고백할래요.”
       이내준은 불현듯 깨달았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쉼 없이 포기를 종용 받더라도 붙들고 싶어지는 것이 특별이고 사랑이라고. 포기해야 할 상황에 포기하지 않아서 불행과 절망을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주은성과 동행하며 그를 견뎌낼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주은성의 곁에 서서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맞이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뼈 아픈 현실이 주은성과의 이별을 강요하더라도, 꿋꿋하게 주은성의 곁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퍼런 멍에도 불구하고 무용을 지속하고 싶었던 것처럼. 체력이 닳고 닳아도 무용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처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은성은 무용과 같이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 아닐까.
 
      고백 기대할게요. 나직한 문장 아래로 이내준이 웃었다.
      이 특별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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